조천에서 중산간도로로 가는 길 오름밧(봉소동) 바로 남쪽 길 옆에 '監司公墓域'이라는 표석이 있고 그 옆에 '진화문(進化門)'으로 들어가면 강영(康永)의 묘가 있다.
강영은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씨(신덕왕후)의 4촌 오빠로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의 난) 당시 전라감사로 있었다.
방원의 난으로 세자 방석과 방번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 일은 조선 태조 7년(서기 1398)의 일이고 그 외삼촌인 강영은 4년후인 태종 2년(서기 1402) 제주도로 귀양을 오게 된다.
강영은 함덕지경에서 제주고씨 소실을 맞아 정(禎)․복(福)․만(萬) 세 아들을 낳아 신천강씨 제주 입도조가 되는데 지금도 함덕에는 강영이 유배올 때 상륙한 곳이라 하여 강영개라 불리는 곳이 있다.
하지만 재미 있는 것은 그가 함덕 지경에서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었을 뿐 후손들은 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십년전 이곳을 경작하고 있던 농부가 밭갈이를 하다 웬 평평넓적하게 잘 다듬어진 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강영 묘에 부장했던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성명과 생졸년월일․행적․무덤의 좌향 등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묻는 판석)이었고 전문가들이 살펴본 결과 강영의 묘임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지석은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강영 묘 앞에는 안무사 겸 목사 기건과 김달원에 대한 송덕비가 서 있어서 눈길을 끄는데, 송덕비를 세운 까닭은 묘의 발견과 관련된다. 김달원은 꿈 속에서 강영의 묘를 보았다는 사람이고, 기건은 지석을 써 준 사람이다.
기건 목사 송덕비에 보면 〔…… 及歿에 葬于漢拏山北東朝天境(古咸德境) 酉坐하니 是古○之所載也라. 奇公이 出宰本州後에 以慕賢心으로 康公之墓에 埋○誌石하니 그 文에 曰 信川康永監司, 壬寅隱跡於斯 有貞.福.萬三子, 有忠義靑坡志라 하니 寔○康公之墓確證也라 ……〕라는 문구가 있어 기건 목사가 지석을 썼음을 알 수 있다.
朝天書院은 康氏 문중에서 서기 1973년 11월 도내 각계 인사 62인의 連署捺印을 받아 「조천서원 창건 통문」을 成均館 및 전국 유명 향교에 보내어 그 答通을 받아 서기 1974년 3월 3일 낙성했다는 건물로 강씨 선조들 중에서 다섯 분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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