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62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제주장례' 어느지역이던 함께 살다간 사람이 임종하면 어떤 형태로든 장례를 치르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제주의 장례풍습은 섬의 문화만큼이나 독특하다. 임종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조관이다. 조관을 해야 조문객을 받을 수 있고 성복제를 시작으로 장례의 모든 의식이 진행되기 시작한다. # 임종후 첫 일이 '조관'....사돈집서 팥죽 쑤어와 대접 제주에서는 조관할때 전통적으로 사돈집에서 팥죽을 쑤어 오는게 관행이었다. 상제들과 친지, 상가를 돌보는 사람들을 위해 쑤어 오는 팥죽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전설이 전해져온다. # 첫 제례는 '성복제'....발인전날 신시에 '일포제' 봉행 성복제는 입관성복한후 초상에서 처음으로 치르는 제례이며 발인전날 신시에는 일포제가 치러지는데 이 제례의 제물은 맏딸인 여상제가 차리는 경우가.. 2011. 4. 30. 하늘아래 첫동네 그리고 그속의 사람들 하늘은 적당히 낮아 있었고 전형적인 봄날씨에 내려쬐는 햇살이 바람이 안드는 어느 구석진 곳을 골라 낮잠이라도 청하고 싶을 정도로 포근하게 세상을 끌어 안았다. 노형을 지나 시내를 완전히 빠져나오면서 펼쳐지는 산과 바다에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편안히 차창에 기대 상념에라도 잠기고 싶어진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볕이 정겨울 정도로 포근하다.우리는 오늘 솔도와 광평리 그리고 헛묘, 삼의사비, 대촌비행장등 서부지역의 답사를 하기로 했다. # 옛 '웃한질'이 이제는 4차선 포장길로... 차는 유수암 단지를 지나 경마장 가까이 가고 있다. 서부산업도로(평화로), 이제는 말끔히 왕복4차선으로 포장되었지만 25년 전만해도 이 길은 웅덩이와 자갈까지 깔리고 양쪽으로 가시덤불이 우거져 작은 우마나 지나갈 수 있는 좁을 길이.. 2011. 4. 30. 귀빈사-사람은 한 시대를 살다갈 뿐이고... 제주4.3 발발 63주기를 한달여 남겨두고 있는 가운데 최근 대통령이 이용했던 장소에 대한 사업을 놓고 이견이 대립되고 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4.19혁명이 반백년을 넘긴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씨가 최근 4.19세대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고 이승만에 대한 공과를 객관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욱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에 체류할때 이용했던 숙소를 기념관으로 조성하는 것을 놓고 이견이 나뉘고 있는 것. 그 중심에 있는게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속칭 '귀빈사'로 불리는 별장. 귀빈사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제주에 머무를 때 두 번 사용했던 별장이다. 이 대통령이 국립목장의 설립을 지시하면서 내도가 잦아지자 측근.. 2011. 4. 30. 삼의사여 믿기는 뭘 믿었단 말이냐? 추사적거지를 나오면 동문터 밖에 길가 옆 귀퉁이에 언뜻 봐선 초라하게 버려진듯한 비석 하나가 지나가는 답사팀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름하여 '삼의사비'이다.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생겨나는 폐단에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는 글로 시작하는 이 비는 '이재수의 난'으로 불리는 1901년 신축년농민항쟁을 이끈 세 장두를 기리는 비석이다. # 100여년전 제주역사 증언하며 서 있는 비석 그 옆의 추사 김정희선생 기념관이 정갈하고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가냘프게 1백여년전의 사건을 증언하며 서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김정희 선생이야 중앙의 정객으로서 제주에 귀향와 인성리에 머물면서 제주에 서예와 학문을 전수해 제주사회에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해서 지금은 .. 2011. 4. 30. 수정사지 - 그 화려했던 날은 가고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지는 1600여년이 넘어가지만 제주에 불교가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한 추적은 아직 정확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제주에는 1만800여 신이 존재하고 한때 ‘당오백 절오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속신앙과 불교가 공존하면서 뒤섞여 주민들 곁에 있었지만 척박한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화려하고 융성한 불교문화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18세기 이형상 목사 부임 이후 도내 사찰이나 민간신앙에 대한 일대 정리가 진행되면서 불교유적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200여년동안 겨우 명맥만을 이어오게 된다. 제주에는 ‘당오백 절오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과 절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육지처럼 큰 사찰이 500개나 됐다는 것은 아니라고 추정된다. 이는 당시 제주의 인구수나 경제력을 가.. 2011. 4. 30. 이야기 역사 - 소길리 석관묘 애월읍 소길리 남쪽으로 평화로를 향해가다보면 소길리 마을운동장이 있고 그 북쪽으로 석관묘가 자리하고 있다. 석관의 크기는 길이 3m, 높이 0.73m, 폭 1m로 모두 6장의 현무암 돌판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눈에 봐도 크게 보여 비교적 많은 돌판으로 이루어진 석곽묘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주민들에에 따르면 일제 때 도굴꾼에 의해 속칭 '자랑못(좌랑못이라고도 함)' 남쪽에 위치한 고분이 파헤쳐진 후 이 석관이 연못 근처에 버려져 있었고 그후 현재 자리고 있는 곳 옆의 속칭 꽃동산 무성한 잡초 사이에 묻혀 있던 것을 지난 1961년 마을청년회가 분실을 우려해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석관묘는 돌로 관을 만들어 매장할때 사용한 것인데 이러한 매장풍습은 있었다고 전해지고는 있지만 제주에서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 2011. 4. 30. 이전 1 ··· 6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