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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천리를 돌아왔던 유배의 땅

광해군, 명분론에 밀려 제주해협을 건너고

by 여랑 2011. 4. 28.

고려시대부터 제주에 유배당한 사람들중에는 왕족을 비롯해 많은 정치인들이 있지만 가장 세인의 이목을 끌었던 인물은 광해군일 것이다.

광해군은 한때 조선 제15대 임금으로 국정을 이끌다가 폐위되어 온 최고의 유배객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1623년 3월13일(음력) 서인세력에 의해 조카인 인조를 옹립하는 반정이 일어나면서 그는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뒤에 강화도에 부속된 작은 섬 교동에 이배되었다가 인조 15년(1637) 4월에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에게 유배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널 때에는 배의 사방을 모두 가리어 밖을 보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에 유배시키는 것을 비밀리에 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추운 겨울에 추위를 염려하여 겨울옷을 광해군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은 폐위된후 폐비 유씨와 폐세자 질, 폐세자빈 박씨 등 네사람과 강화도에 위리안치되는데 안치된지 두달만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 4년동안의 제주유배생활 한 많은 인고의 세월

 이렇게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8개월후에는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고 혼자 유배생활을 이어간다. 광해군은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지 14만인 1637년에 제주도로 들어오게 되는데 4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다 67세의 나이로 18년동안의 유배생활을 뒤로하고 생을 마감한다.

광해군의 제주유배 생활동안의 거처에 대해서는 지금의 제주북교 서남쪽, 복원된 목관아 서북쪽 구석에 있는 기와집 주변이었다는 설과 동문로터리 분수대앞 지금의 기업은행 자리라는 설, 그리고 중앙로 현대약국 맞은편이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4년여의 기간동안 거처를 옮길수도 있어 어쩌면 이 3곳 모두가 맞을수도 있다.

광해군의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은 초연한 자세로 생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을 거처하는 모욕을 당해도 묵묵히 의연했으며 심부름하는 사람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멸시해도 전혀 분개하지 않고 굴욕을 참고 지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가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중 쓴 시를 보면 그의 심중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다.

<바람 불고 비가 날려 성머리를 스치는데
드높은 누대에 짙은 안개만 자욱
창해의 성난 파도 소리 어스름에 들려오니
푸른 산 스산한 모습 가을도 깊어
돌아가고픈 마음, 왕손초 볼적마다 괴롭고
나그네 꿈속에서도 한양 땅을 보고 놀라네
나라의 존망 소식도 끊기었으니
물안개 서린 강, 외로운 배에서 쉬어나 볼까
------<제주적중(濟州謫中)>에서-----

결국 그는 제주에서의 유배생활 4년만인 인조 19년(1641) 7월7일에 유배장소에서 사망한다.

                                   광해군의 적거지로 추정되는 현 중앙로 국민은행 자리

인조는 광해군이 죽자 예조참의 채유후를 보내 초상을 치르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각 도의 감사에게는 같이 따라가 초상 치르는 것을 감독하도록 했으며 광해군의 시신을 옮겨 양주에 안장하였다.

광해군이 사망하자 당시 제주목사 이시방과 도민들은 조정에서 예관이 도착할 때까지 예를 갖추어 호상(護喪)하였다. 광해군의 죽음을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후일 음력 7월7일 제주에 내리는 비는 광해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주도민들이 흘리는 눈물이라 전해지기도 하였다.

사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오히려 붕당정치의 희생자로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을 꽃피워 보지도 못한채 밀려난 불행한 군주였다.

# 사대주의자들의 명분론에 밀려난 군주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의 대의명분은 첫째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점과 둘째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명한 전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서인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의 주역들은 명분만 앞세우며 끝끝내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함으로써 결국 청에게 임금이 무릎을 꿇고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다음으로 영창대군과 능창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왕권위협세력에 대한 행위를 폭정으로 몰아붙인 점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일부 왕권위협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구제를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조선사를 바라볼 때 성군 또는 명군으로 불리는 왕들도 자신의 정적제거에는 한치의 틈도 허용치 않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태종과 세조였다. 태종은 이복형제를 죽였고 동복형제도 유배시켰으며 계모 강씨의 능을 일개 후궁의 무덤으로 전락시키고 양녕대군을 폐세자 시킨인물이었다.

그리고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였으며 형수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인조반정을 중종반정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이도 많은데 그 내용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반해 광해군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이들에 의해 밀려난 군주였다. 이는 중종이 반정세력의 추대를 받았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쿠데타를 주도했던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제15대 임금으로 등극, 15년간 조선을 통치했던 광해군은 30살이나 차이를 둔 적자인 영창대군과 형인 임해군을 제치고 군왕으로 등극한 것이 어쩌면 그의 불행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 필부로 살았다면 불행하지 않았을지도...

역사에 가정이란 허용치 않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지 않고 그냥 왕실의 곁가지로 살아갔다면 더 불행했을 수도 있겠지만 평범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광해군은 부친인 선조가 40세를 넘길때까지 세자를 세우지 않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후사를 정해야 한다는 요구를 더 이상 물리치지 못해 세자로 책봉된다. 그리고 형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명의 고명을 받지 못했지만 전란중 소임을 다하여 신임을 얻게돼 광해군은 전란이 아니었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제주에는 조선 중기들면서 수많은 정치적 죄인들의 유배지로 이용되지만 광해군은 그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송시열이나 김정희, 최익현 같은 당대의 최고 학자들이 오기도 했으나 임금을 지내다 제주로 유배를 온 사람은 광해군이 유일하다.

하지만 대정에 유배됐던 추사의 유배지를 잘 단장해 살피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과는 달리 200여명의 제주유배객중 최고층인 광해군의 유배지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 광해군이 패주로 몰린 탓인가.

단지 그것이 이유라면 우리는 역사의 승자에게만 너무 관대한 면이 있는 것이 아닌지. 혼란스런 정국을 바로잡겠다고 일으켰던 5․16혁명이 결국은 쿠데타로 심판되지만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는 것처럼 광해군의 공과를 따지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유배지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목관아를 건축하면서 수백억의 예산을 투입하는 제주시가 다른 유배인은 제쳐두고라도 최소한 그 옆에 있는 광해군의 적소도 매입해 단장하고 활용하지 않으면서 큰 일에만 손을 대고 일을 벌려놓는 것같아 영 개운치가 않다.

다른 지방 같으면 다산 정약용의 적거지를 잘 단장하는 등 유명인들의 오고 갔던 처소를 활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최고위층의 유배 적거지를 단지 패주라는 이름으로 내몰라라 하는 것같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