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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이야기 제주역사

돌하르방-제주의 어제와 오늘 두번째

by 여랑 2011. 4. 30.
관덕정이 아무런 말없이 500여년을 지켜오고 있는 건축물이라면 관덕정 사각에 위엄있게 어쩌면 묵직하게 서 있으면서 무슨말인가를 하는 것같은 돌하르방은 색다른 돌문화를 보여주는 제주문화를 물씬 풍기는  석조물이다.

우리나라의 걸죽한 문화재가 탑, 석상, 부도 등 돌과 관련된 것이 적지 않듯이 제주도 돌의 고장이라 불리울 만큼 돌과 관련한 민속자료가 수두룩하다. 이 가운데 돌하르방은 제주의 이미지를 살려주는 민속자료(2호)로 지역민들뿐만 아니라 국내․외 관광객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

◀관덕정앞 돌하르방

부리부리한 눈, 우뚝한 코, 꾹다문 입, 불거진 뺨 등 어디에 있든 퍽이나 인상적인 돌하르방은 이제는 각종 행사때 로고로 사용되고 상품브랜드로까지 확대되며 제주를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로 굳어지고 있다.

지금은 돌하르방으로 불리고 있는 이 석상은 과거에는 '벅수머리','우성목','무성목','옹중석'으로 불리운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김영돈 박사는 벅수머리란 명칭을 우리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장승을 흔히 '벅수'또는 '법수'라는 것과 연결해 '벅수'라는 말에 '머리'란 말을 더한 복합어로 보고 있다. 

'옹중석(翁仲石)'이란 담수계에서 펴낸 탐라지(耽羅誌)에 나오는 명칭으로 진시황때 흉노족 등 북방 침략자를 여지없이 무찔렀다는 용맹스러운 '완옹중'이라는 사람이 죽자 아방궁 바깥에 동상을 세웠는데 다시 쳐들어오던 오랑캐들이 이를 보고 겁에 질려 혼비백산하자 신격화되어 관아입구 등에 세워졌다고 전하는 것에서 유래하는 이름이다.


성문 앞에 부리부리한 눈으로 두손을 모으고 지켜서서 백성들의 안녕과 평온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중국의 '옹중석'을 연상함으로써 불렸다는 이름인데 그러나 이 옹중석은 문헌에나 나오지 민간사회에서는 일반화되지 못했다.

돌하르방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대체적으로 길어야 한말이후인 100년 정도이고 짧다면 해방이후에야 많이 사용된 용어임이 거의 확실하다.
 
정확한 어원의 형성시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구한말 많은 유배객이 들어오고 뭍과의 교통편이 나아지면서 들고 나던 사람들로부터 돌하르방이란 용어가 잉태됐거나 아니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피난민들이 제주에 들어오면서 외지인들의 입에서 눈에 보이는 형상을 표현한 장난삼아 표현한 것이 돌하르방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는

◀삼성혈앞 돌하르방

설이 유력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섬과 뭍의 교류가 많지 않은 폐쇄된 지역에 전쟁으로 인해 이곳을 찾은 이방인들의 눈에 돌하르방은 상당히 이색적인 느낌이 드는 대상이었을 것이고 섬의 문화에 대해서도 상당히 독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 크게 틀린 말을 아니다.

그러던 것이 1971년 8월 제주도문화재위원회에서 민속자료 제2호를 지정할 때 '돌하르방'이란 명칭을 갑론을박 끝에 공식명칭으로 채택되면서 오늘날처럼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돌하르방이란 명칭이 일반화되면서 이 어원에 대한 심오한(?) 연구로 몽골어의 '하라'(망보다, 지켜보다)라는 말과 '바라간'(물체)을 복합시켜 '하라바라간'(망보는 물체 또는 지켜보는 물체)이 되고 이것이 '하르방'으로 바뀌어 졌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는 지난 고려때 몽고의 지배를 받으면서 상당부분 몽고의 언어잔재가 남아 훗날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을 토대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너무 심오(?)해 버린 것같은 느낌이다.

 제주에는 가까운 상대방에 대해 '방'이나 '망'이란 말을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아버지를 '아방', 아주버니를 '아지방', 할머니를 '할망', 아주머니를 '아지망'이란 어원까지 밝혀내야 돌하르방의 몽고어원설도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돌하르방 조형에 대한 유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대략 4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가 육지영향설로 우리나라에 돌장승이 나타나는 시기가 18세기 초반부터 중반에 이르는 시기인데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돌장승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다.

둘째는 남태평양에 널리 퍼진 거인숭배사상(이스터 섬의 석상이 대표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남방기원설, 몽고에 있는 비슷한 석인상이나 이를 지칭하는 단어가 돌하르방과 비슷해 몽고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몽고기원설, 그리고 제주자생설 등이다.

◀대정읍 인성리 돌하르방

하지만 이처럼 돌하르방의 생겨나게된 설들 모두가 추상적이거나 단편적이어서 어느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특히 몽고기원설도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위에서 말한 내용들에 대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의 일반화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돌하르방은 지금은 관덕정이나 삼성혈을 비롯해 도내 주요 관광지만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대상이 돼 관광객들은 원래부터 이런곳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돌하르방의 있었던 위치는 이런 곳이 아니다. 이는 문화재의 현상불변경원칙에 따른다면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돌하르방은 제주지방의 행정구역이 제주목,대정현,정의현으로 나누어 졌던 과거에 각 현청소재지의 성문 앞이나 그 주변에 세워졌다. 

기록에 따르면 효종 4년(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이 저술한 '탐라지'에 '옹중석'은 제주읍의 성 동․서․남 삼문밖에 있었고 영조 30년(1754년) 김몽규 목사 재임때 '삼문이 헐림으로 인해 2기는 관덕정에 2기는 삼성사 입구로 옮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는 돌하르방이 언제부터 세워지게 됐는가에 대한 의문은 해소할 수 없지만 17세기 당시에 돌하르방이 도내에 존재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표선면 성읍리(옛 정의현) 돌하르방
이처럼 성문밖에 있던 돌하르방들은 언 듯 봐서는 별다른 차이점 없이 모두 같은 돌하르방으로 보이지만 각 고을 성문 앞에 세워져 있는 돌하르방별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을 갖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 3개지역의 돌하르방이 나름대로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주는데 제주목의 돌하르방은 비뚤어지게 쓴 감투와 뭉툭한 눈매, 쳐든 얼굴 등에서는 무인의 호방한 위엄이 서려있다.

  
제주도기념품으로 제작돼 우리 눈에 익숙한 돌하르방은 대부분 제주시 지역의 돌하르방을 모델로 한 것이다.

대정현 지역의 돌하르방은 키가 작고 온순한 인상이다. 곡선적이며 소탈하고 나부죽하고 그러면서도 해학적인 모습이 정감이 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눈은 쌍안경을 낀 듯 튀어나오거나 윤곽만 새겨져 있는데 어떤 경우든 눈동자는 분명하게 드러나며 코도 갸름하여 제주시내 돌하르방들의 뭉퉁한 주먹코와는 사뭇 다르다.

정의현은 기하학적이고 날카로운 단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게슴츠레한 눈과 선 하나로 그어져 있는 입 모양은 그저 덤덤하거나 무뚝뚝해 보이며 귀는 작으며 손은 윤곽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제주시 지역의 돌하르방이 지배층의 권위를 표상한다면 대정과 정의현 지역의 돌하르방들은 순박한 제주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돌하르방은 어떤 이유로 해서 세워지게 됐을까에 대해서는 대부분 문지기 역할을 하면서 고을 안의 무사형통을 빌어주는 수호신적 기능과 함께 고을안의 사기(邪氣)나 악질의 들어옴을 방지하는 주술적 기능, 그리고 주현청의 소재지를 알리는 위치적 기능으로 요약된다.

  ◀제주시청내 돌하르방
현재 남아있는 옛 돌하르방은 47기. 제주목 23기, 정의현 12기, 대정현 12기가 남아있다. 정의현과 대정현의 돌하르방은 원위치를 거의 고수하고 있지만 제주시의 돌하르방은 2기가 한국민속박물관에 가 있고, 나머지 21기도 제주대․삼성혈․목석원․관덕정 등 원위치에서 모두 벗어나 있다.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인고와 괴로움을 이겨내고, 비바람 속에서도 까무러치지 않는 제주인의 삶의 정신이 녹아있는 돌하르방은 그 맥이 현재까지도 우리의 정신속에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돌하르방을 제작할 때 돌하르방 자체의 개성미와 다양성을 망가뜨리는 제작은 삼가야 한다. 또 원래 돌하르방이 쌍쌍이 있었던 것처럼 세지역의 돌하르방을 한쌍으로 묶고 이들 돌하르방이 어느 지역에 세웠졌는지 등의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심도있는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방안이 모색돼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