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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이야기 제주역사

하원동 傳왕자묘 석상의 비밀<하>

by 여랑 2011. 4. 30.
무덤을 지키는 한국의 대표적인 이국풍 석상은 통일신라시대 경주 괘릉의 무인석과 문인석상이라고 할 수 있다. 괘릉의 무인석은 이란인이고 문인석은 위구르 인이다.

그러나 이 양식은 이후 전래되지 않은 채 괘릉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또한 경기도에 있는 이애(李?(1363~1414)와 태조의 8남 5녀 중 맏딸인 경신공주 무덤의 무인석은 몽골의 복식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석상인데 한눈에 봐도 이국풍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주의 傳왕자묘 문인석상도 숱한 한국 무덤 석상 가운데 희귀한 이국풍이다. 원래 한국의 문·무인석은 당나라의 묘제에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시대에 정착되었다. 이것이 고려에 계승되면서 공민왕릉의 묘제(墓制)로 양식화되었고, 이 묘제는 이후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

무덤 앞에 석상을 세우는 전통은 후한(後漢)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이는 상(商)·주(周) 시대부터 있어온 순장(旬葬) 풍습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후한의 《풍속통의(風俗通義)》<신괴편(神怪篇)>에, '묘 입구에 석인(石人), 석수(石獸)가 있다'고 했고, 한(漢) 나라 《수경주(水經注)》<유수(流水)>에, '비 옆에 석인 두 개를 세웠고, 여러 석주(石柱)와 석수(石獸)가 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물론 전한(前漢)시대부터 무덤에 석물을 세웠다. 그때의 석물은 석주(石柱)라고 부르는 돌기둥인데 석표(石標)라고도 불렀다. 후한(後漢) 낙안태수(樂安太守) 묘 앞에는 두 개의 석인상이 있다(楊寬, 2005).

◀이애·경신공주 무덤의 무인석. 15세기초.

이 두 석인상의 몸에 '漢故樂安太守표君亭長' 과 '府門之卒'이라고 새겨진 것으로 보아 묘를 지키는 경비병이다. 석인상이 문인과 무인으로 구분하여 배열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인데, 8세기 후반에야 문인석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국 무덤의 석인상들은 약간씩 지역마다 특징이 있을 뿐 이국풍의 석인상은 보기가 드물다.
특히 제주의 傳왕자묘 문인석상은 그야말로 여타의 지방의 문인석보다 독특하다. 그렇다면 이런 이국풍의 석인상은 어디에서 왔을까.

# 바다를 건넌 윈난의 바이바이 태자
 
먼저 김인호와 김태능이 주장하는 바이바이 태자(佰伯太子) 묘의 석상이라는 설은 현재 전해지는 석상이 중국풍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중국의 문인석들은 현지 소수민족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바이바이 태자는 중국 윈난(雲南)에서 강제로 제주에 온 유배인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명나라 황제는 운남을 평정하고, 양왕과 그의 가족을 잡아서 1382년 7월, 제주도로 압송하여 안치케 하였다.

이들이 제주에 온 7년 뒤, 1289년에 명나라 황제는 제주에 안치된 바이바이 태자의 아들 육십노와 내시 복리(卜尼)를 소환하였고, 바이바이 태자 아들 육십노는 명나라에서 돌아와서 1년 만에 제주에서 죽었다. 또 1392년이 되면 주원장은 다시 원나라 양왕의 자손 아얀테무르(愛顔帖木兒) 등 4명을 탐라에 안치하여 바이바이 태자의 가속과 함께 모여 살도록 했다.

제주에서의 이들의 삶은 어렵기 그지없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의하면, 왕은 1395년 5월에 바이바이 태자에게는 쌀과 콩 400곡(斛, 10말의 단위)과 저마포(苧麻布, 모시) 30필을, 양왕(梁王)의 손자에게는 쌀과 콩 100곡(斛)과 저마포 10장(匠)을 하사하였다.

                                   금나라의 문인석▶

바이바이 태자는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그로부터 5년 뒤(1400년) 시종(宦者)를 보내어 말 3필과 금가락지를 조정에 바쳤다.
바이바이 태자는 윈난에서 제주에 유배 올 때, 금은기(金銀器)와 가락지 등 패물을 많이 가지고 왔고, 그것으로 어려운 섬 생활의 밑천을 삼았다.

몽골이 집권하던 윈난(雲南)은 1382년(홍무 15년) 주원장의 예하장수 전우덕(傳友德)에게 평정되었다.

원나라 위순왕(威順王)의 아들인 바이바이와 양왕(梁王)의 가속(家屬) 318명은 붙잡혀서 남경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탐라로 유배된 것이다.

그러나 《명사(明史)》에 의하면, 양왕(梁王) 바자라오르미(bajara-ormi)의 손자 아얀테무르와 함께 탐라에 이른 것은 좌승상(左丞相) 달적(達的)과 우승상(右丞相) 여아(驢兒)의 거속이었다고 한다.

탐라에 안치된 대표적인 가문은  위순왕(威順王)과 양왕(梁王) 바자르오르미의 집안이다.
쿠빌라이 손자이면서 진남왕(鎭南王) 탈환(脫歡, Toqon)의 아들인 위순왕(威順王)의 이름은 콘츠부카(寬徹普化, Kon?-buqa).

그는 1326년에 왕이 되어 무창(武昌)을 지키면서, 농민 봉기를 일으킨 홍건군(紅巾軍)을 진압했으나 아들 셋을 그 농민군에게 잃었다.

콘츠부카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화상자(和尙者)는 의왕(義王)에 봉해져 혜종(惠宗) 측이 되었으나 혜종이 북으로 이주하자 준왕(准王) 테무르부카(帖木兒不花)를 도와 대도(大都)를 지키다가 도시가 함락되면서 피난했다.

양왕(梁王) 바자르오르미는 쿠빌라이 다섯째 아들인 우케치(忽哥赤)의 후손으로 윈난(雲南)을 지켰다. 원·명 교체기에 명에의 귀속을 거절하며, 항복을 종용하러 온 명나라 사신을 두 번이나 죽이자 명은 군대를 동원하여 윈난을 토벌하였고, 바자르오르미는 최후까지 저항하다 식구 및 측근들과 함께 죽었다.

홍무 14년(1381)에 윈난은 평정되었다(B.예르데니바타아르, 2009) 이들 두 집안 말고도 탐라에 안치된 몽골인들은 그 숫자가 많았다.
1388년 명 황제는 북방 정벌 시 귀순해 온 타타르의 친왕(親王) 등 80여 호에 대해 모두 탐라에 가서 거주할 것을 명하여, 새집을 짓고, 헌집을 수리하여 모두 85개의 집을 마련해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제주에 거주한 중국의 성씨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趙, 李, 石, 肖, 姜, 鄭, 張, 宋, 周, 秦은 元나라 성씨이고, 梁 , 安, 姜, 對는 윈난(雲南)이다.
명나라 초년에 윈난을 평정하고 양왕의 家屬을 제주에 안치했다.

명나라가 등장하면서 여말선초에 많은 윈난인과 몽골인들은 정치적으로 제주에 안치되었다. 또한 몽골 지배 시기 제주에 왔다가 토벌에서 살아남은 군인들과 목호(牧胡), 죄수(罪囚) 등은 조선인으로 동화되어 제주에서 살았다.
오늘날 제주의 언어나 민요, 생활 민속, 지명 등에 이들이 습속이 전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傳왕자묘 석상의 이국적 풍모
 
현재까지 윈난인과 몽골인들이 제주에서 거처했던 장소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傳왕자묘도 누구의 묘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제주 섬 어딘가에 살았고, 그 후손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국풍의 석상이라는 끈이 하나 남은 것은 오히려 상상력과 수수께끼를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 때문에라도 도상해석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傳 왕자묘의 석상은 기본적인 도구로 제작된 서투른 민간 석공의 솜씨다. 석상 전체의 기법은 거칠게 다듬은 후 필요한 부분만 선각(線刻)으로 강조한 졸렬한 표현에 그치고 있다.

특히 석상의 의상의 주름, 대(帶), 손, 홀, 귀, 단령(團領, 둥근 옷깃) 만을 선각으로 묘사했다는 것은 도구와 솜씨, 제작 기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석상 전체를 보면 자연석을 가공한 것이 매우 거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통 뒤편에는 단순하게 석재를 떼어내기 한 흔적이 보인다. 넓은 면으로 대충 털어낸 채 자세히 다듬지 않고 그냥 둔 것이다. 눈과 얼굴 부분은 앞서 말했던 원시적 기법인 '좇아 파기 방법(循石造型)'을 주로 사용하였다.

만일 傳왕자묘 석상이 바이바이 태자의 석상이라고 해도, 윈난을 거쳐 남경에서 유배 오는 유배자들이 바이바이 태자가 죽기도 전에 문인석상을 만들어 운반해 왔다는 것은 불가능한 가설이다.

하지만, 윈난 출신의 민간석공이 바이바이 태자가 죽자 가까운 서귀포 영실의 조면암을 캐어다가 만들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정할 수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경주 괘릉의 위구르계 문인석

석상의 재료가 한라산 영실 조면암으로 추정되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이 이국 사람일 때는 경우가 또 다르다.

왜냐하면, 각 민족마다 인물을 만드는 방식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여타 문화권마다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문화권의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문화권의 인물을 표현하게 된다. 한 마디로 이국풍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이국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석상을 만든 민간 석공의 솜씨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 가까이 둥근 깃을 표현한 것, 복대를 두른 것, 홀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복두(?頭)에 공복(公服)을 입은 상이다.

홀이 긴 것, 홀을 잡은 손이 얼굴이나 몸체에 비해 턱없이 왜소한 것은 석공이 아마추어라는 사실임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비례 감각이 없고, 오로지 선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집중성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조 된 것(홀)과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손)에의 차이가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런 고졸함이 민간석공이 만든 석상의 매력이 될 수도 있다.

홀은 관리가 조회(朝會)시 관복을 입고 손에 지니는 일종의 수판(手板)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대(周代)부터 사용됐다고 한다. 원래 홀은 임금에게 주청(奏請)할 내용을 간단히 적는 것이었으나 점차 의례용 장식품으로 변했다.
크기는 1자(33cm) 정도. 송나라 제도를 받아들인 고려 때는 그보다 더 길었다. 품계에 따라 1~4품까지는 상아홀을, 5품에서부터 9품까지는 나무홀을 잡았다. 손에 잡는 하단부는 비단으로 둘렀다.

傳왕자묘의 석상의 홀은 상례 때 상주가 집는 방장대(方丈帶)가 아니다. 중앙에 잡는 방장대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이런 표현은 누구에게 들어서 표현하다 보니 과장돼 버린 민간석공의 솜씨에 불과하다. 손의 표현이 어린아이 손처럼 돼 버린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리하면 이 석상은 느낌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괘릉과 이애·경신공주의 석상처럼 이국풍이라면 이국풍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의 석상에는 傳왕자묘 형태의 석상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의 상상력은 14~15세기를 전후한 제주 역사의 언저리에서, 더욱 풍부한 가설들로 여사적인 사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퍼온글]김유정(미술평론가)의 '미술로 보는 세상' - <제민일보 2011년4월30일(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