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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이야기 제주역사

하원동 傳왕자묘 석상의 비밀<상>

by 여랑 2011. 4. 30.

몽골 초원을 답사하노라면, 광활한 대지 곳곳에 할석을 땅에 박아 사각형으로 만든 돌궐식 묘지가 눈에 띈다. 또 간간히 사슴문양을 새긴 아름다운 암각화 석주들, 우리네 거욱대와 같은 어워가 사람을 맞는다. 제주 문화가 약 100년의 몽골 지배 동안 문화적 습합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목축, 언어, 의복, 음식 등에서 아직도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제주의 동자석 또한 한반도와는 다르지만, 오히려 알타이계 석상과 유사한 특징이 많다.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문화전파설은 차치하고라도 문화의 동시적 발생과 등장은 우연치고는 너무 유사한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석상 좌우로 세울 때 각기 다른 손 올라가는 것, 자연에서 배운 대칭 감각

제주에 '개역'이 라는 음식이 있다. 보통 장마철 농한기가 되면 도정하지 않는 보리를 솥뚜껑에서 볶아 가루를 만들어 두었다가 더운 여름날이면 물에 타 먹거나 보리밥에 비벼 먹는다. 아이들은 개역을 종이 봉지에 담아 얼굴에 묻혀가며 마른 목을 침으로 넘기며 맛있게 먹는다. 물론 주식이라기보다는 더위를 쫓는 별식(別食)이고 아이들의 간식이었지만 그 연원을 추적하면 놀랍게도 알타이 음식과 맥이 닿는다.

◀傳왕자묘 석상, 제주도자연사박물관 소장.

알타이 음식에는 제주의 개역과 같은 '딸깐'이라는 보리음식이 있다. 알타이 사람들은 아침과 낮에 어른이나 아이 모두 가족의 일원이면, 볶아두었던 보리를 배가 고플 때마다 언제든지 자기 스스로 맷돌을 돌려 필요한 분량만큼 빻아 자신의 그릇에 담아 먹는다. 보릿가루는 대개 마른 상태로 섭취하거나 물과 혼합하여 먹는데, 남알타이인들은 우유와 함께, 북알타이인들은 꿀과 함께 섞어 먹기도 한다(V.I.베르비쯔끼, 2006).

또 제주에서 말고기를 꼬쟁이에 끼워 구워먹는 것, 내장으로 만든 순대와 내장을 삶아 먹는 것, 발효된 마유(馬乳)의 증기를 찬물로 식혀 '아라끄'라는 술을 만드는 제조 기술도 제주의 고소리 술 제조법과 방법이 유사하다. 물론 이외에도 몽골 점령기에 전해지는 북방 문화는 다양하게 많다.

제주에 매우 궁금한 석상이 있다. 일명 왕자묘라고 전해지는 무덤 앞에 세워진 2기의 문인석상이 그것이다. 1기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 석물 전시장에 있고, 다른 1기는 목이 부러진 채 서귀포시 하원동 傳왕자묘 1호분 앞에 서 있다. 
傳왕자묘 석상은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지석(誌石)이 발견되지 않아 누구의 무덤인지 의견이 분분하고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무덤은 방형분이고, 층을 달리하여 다른 방형분 2기가 있다.

# 전(傳)왕자묘 석상에 대한 여러 설

전(傳)왕자묘는 서귀포시 하원동, 방애오름 북쪽 '여가밭'이라는 작은 동산에 있는 분묘군(墳墓群)으로, 행정 지번(地番)은 서귀포시 하원동 산 21번지. 이 傳왕자묘에 대한 기록은 이원진의《耽羅誌草本》<대정현(大靜縣) 고적(古蹟)조>,《大靜郡邑誌》, 김석익(金錫翼)의《心齎集》,이응호(李膺鎬)의《탁라국서(?羅國書)》에 기록돼 있다. 이 기록들 모두 傳왕자묘를 현재의 하원동 산 21번지를 가리키고 있으며, 거리에 대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傳)해오는 왕자묘는 누구의 묘인가가 중요한데, 지금까지 이 묘가 누구의 묘인지 여러 사람이 주장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 설들은 김태능설, 김인호설, 강창화설(발굴조사 견해), 문기선 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김태능(金泰能)은 <元順帝避難宮址와 伯伯太子의 墓(1991)>라는 글에서, 백백태자의 묘의 근거로 "분묘 양측에 조면암으로 조각된 문관석상의 관복(冠服), 관대(冠帶), 손가락과 관복(冠服) 소매 주름 조각상태, 관모(官帽)의 조각이 제주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문관석상(文官石像) 관(冠)과는 그 모양이 다르다" 것이다. 즉 복식이나 조각 수법 면에서 흔히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조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인호(金仁顥)도 <濟州島 古墳에 대한 一見解(1995)>라는 글에서, "석인상의 돌이 제주에서 흔히 '먹돌'로 불리는 아주 딱딱하고 미끄닥한 냇돌이었고, 복식형태나 특히 홀(笏)의 크기, 그것을 잡은 손의 위치가 제주도 산소에서 보는 것과 크게 달라 특이한 감을 준다." 고 했다. 그는 말 무덤(馬塚)을 함께 조성한 점, 한국이나 제주도 양식이 아닌 특이한 무덤과 문인석 등을 들어 백백태자 묘라고 주장한다.

강창화는 《濟州 河源洞 墳墓群(2000)》에서, 분묘군이 최근 고씨 집안에서 관리해 온 점을 들며, 문충걸(文忠傑)의 사위가 고봉례(高鳳禮)라는 사실을 들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우고 있다.

즉, "1601년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에 문충기(文忠基)가 연루됨으로써 집안이 몰락하자 외손에 의해 분묘가 관리된 것은 아닐까?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면, 이 분묘와 남평문씨와의 관련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3기 분묘의 주인공은 남평문씨 남제공파 왕자직 역임자인, 文昌祐, 文昌裕, 文公濟, 文臣輔, 文忠傑, 文忠甫, 文忠世, 文承瑞 중 어느 누구일 가능성이 있으며, 2대에 걸친 묘역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실조면암으로 추정되나 중국 소수민족 석상으로 보이는 까닭은 제주에 남아있는 북방 문화(?)


문기선은 <제주 최초의 석상 조성적 조명 연구보고(2003)>라는 글에서, "몽골인 복식 유풍이 남아 있고, 관두의(두루마기)를 입고 긴 방장대를 들고 있으며....북방형 발립(鉢笠)을 쓴 채 여막살이 하던 모습을 석상으로 조성....제주도 일반적인 석상과 크게 다른 것이 특징이다." 라고 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전해오는 유리원판 자료가 '가래천변 장군총 출토유물'이라고 명명돼 있어서, 이 무덤은 남평문씨 왕자들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기선의 주장은 강창화의 <조사보고서> 내용을 근거로 심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세기 중국의 능묘중 마부상▶

傳왕자묘 문인석 1기가 어떻게 제주특별자치도자연사박물관에 있는가는 문기선의 글에 언급돼 있다. "비교적 온전한 한쪽 문인석상은 누가 가져갈 요량으로 제자리를 벗어나 굴러다니던 것을 만농 선생과 이영배 관장이 어렵게 발견하고, 남제주군청 문화공보실장에 위탁하고 다시 옮겨져 현 제주민속박물관에 이관·보존하고 있다." 는 것이다.

傳왕자묘역에 있는 3기의 분묘와 문인석은 2000년 제주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석상이다. 이 석상은 전장 105cm 넓이 37cm, 두께 26   cm이며 홀의 길이 50cm로 무척 긴 편에 속한다. 목이 소실된 문인석은 전장 60cm, 얼굴있는 문인석에 비해 홀(笏)의 길이가 조금 길다. 

석상은 누가 보아도 한국풍이나 제주도 풍이 아닌 이국풍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기는 모자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이마 위에 모자 하단부가 띠처럼 남겨져 있다. 옷은 소매가 길고 두 손으로 긴 홀을 중앙에서 받쳐 들고 있다. 홀을 잡은 손의 모양은 목 있는 석상이 오른손을 올리고 있고, 목 없는 석상이 왼손을 올리고 있다.

이 두 석상을 마주 세우면, 음양의 균형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신체는 좌와 우,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쌍을 이루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좌와 우'라는 글자도 금문(金文)에서 보면, 서로 대칭을 이루는 글자가 되는데 두 개를 포개면 데칼코마니 한 것처럼 형태가 딱 들어맞는다(岩田慶治,2005).
 
이것을 '대칭의 법칙( low of symetry)'이라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체나 동물들이 대칭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정상적(불구)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불안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G.V. Plekhnov, 1989).

그래서 인체석상이나 동물석상을 좌우로 세울 때는 각기 다른 손이 올라가도록 만들어야 안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연에서 배운 대칭 감각 때문이다.

傳왕자묘 석상의 얼굴 부분은 매우 독특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눈은 크지만 도드라짐이 덜 하고, 코 또한 높지도 않고 작은 편이다.

이 석상은 조각의 심도(深度)가 낮은 편인데 두꺼운 돌을 깎으며 코와 눈을 강조하며 높인 것이 아니라, 약간 둥그스름한 돌 자체에서 눈과 코를 파들어 가면서 표현했기 때문에 눈과 코의 볼륨이 약해진 것이다.

특히 코는 코 높이나 얼굴 높이가 수평이 되는데 코 양옆만 파서 강조한 것 때문이다. 눈을 처리한 조형적 기법은 '좇아 파기 방법(循石造型)'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단단한 돌이나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두드려서 표현하고 있다.

이 순석조형(循石造型) 방법은 큰 석재를 다룰 수 있는 조각기술이 부족하고, 석재 공구가 미흡할 때 쓰이는 방법이다. 이 순석조형(循石造型) 방법은 진한(秦漢) 시대에 유래하고 기술력이 부족할 때 많이 나타난다. 손을 몸에 붙이는 자세 또한 조각기술의 한계 때문이다.

◀목 없는 傳왕자묘 석상, 하원동 소재
   
제주도는 예로부터 쇠가 나지 않아 돌을 다루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조각술이 자유롭게 발달할 수 없었고, 선(線) 위주의 단순한 조형성, 크기도 작은 석상들이 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목의 단령(團領)이나 넓고 긴 소매가 선묘 위주로 처리하고 있다. 옥을 끼워 만든 대(帶)를 허리에 찬 것으로 보아 문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에 비해서 작은 손, 긴 홀을 든 것은 어색하지만 석공이 나름대로 엄숙한 영혼의 시종(侍從)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마음은 잃지 않고 있다.

석상의 재료는 누런색과 회색이 비치는 '영실조면암'으로 추정된다. 제주에는 서호 각시바위조면암, 돈내코조면암, 산방산조면암, 백록담조면암, 영실조면암 등 다양한 조면암이 분포돼 있다. 이런 토산재(土産材)는 석상의 풍토성을 규정하지만, 傳왕자묘 석상만큼은 제주다운 석상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특이한 사실이다.

이 석상이 제주 조면암으로 만들었지만 중국의 소수민족풍의 석상으로 보이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제주에 유형 온 중국 사람들의 솜씨가 아닐까. 이 부분에서는 백백태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눈썰미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퍼온글]김유정(미술평론가)의 '미술로 보는 세상' - <제민일보 2011년4월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