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엣이름은 탐라, 탁라, 영주 등 여러가지로 불리웠고 제주의 명칭은 고려말이나 조선초부터 형성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처럼 제주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탐라시대에 대한 기록은 많이 찾아볼 수 없고 유적도 거의 없는게 사실이다.
또한 고려때까지의 유적도 그리 많지 않아 제주의 고대사를 정리하는데 많은 학자들이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사료나 유적들이 많이서 그런대로 제주의 역사를 복원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조선초기 유적이면서 목조건물로 제주시내에서 대표적인 곳이 관덕정이다.
<2006년 제11차 중수후 현재의 관덕정 모습>
관덕정 창건의 전말과 중수내력은 관덕정기를 통해 알수 있는데 관덕정은 세종 30년에 건축된후 500여년동안 10여차례의 중수 과정을 거친다.
<1890년대 관덕정>
제1차 증수는 1480년(성종 11년), 제2차 중수 1559년(명종 14년), 제3차 중수 1690년(숙종 16년), 제4차 중수 1753년(영조 29년), 제5차 중수 1778년(정조 2년), 제6차 중수 1833년(순조 33년), 제7차 중수 1851년(철종 2년), 제8차 중수 1882년(고종 19년), 제9차 중수 1924년, 제10차 중수 1969년, 제11차 중수가 2006년에 있은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덕정은 28개의 민흘림기둥으로 떠받쳐진 단층누각으로 도내에 있는 대표적인 옛 건물로서 처음 건축됐던 당시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알수 없으나 지금의 관덕정 모습과는 크게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덕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사료로는 1702년(숙종 28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제작된 탐라순력도인데 이때는 제3차 중수가 있은후 12년후의 관덕정의 모습이다.
탐라순력도에는 당시 관덕정을 그린 3점의 화폭이 있어 당시의 관덕정 규모와 형태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후 180여년후인 1880년경(제8차 중수를 전후한 시기)에 촬영된 관덕정 사진과 1930년대(제9차 중수이후)에 촬영된 사진이 있어 옛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탐라순력도와 사진자료를 보면 현재의 관덕정의 모습과는 사뭇 차이를 보인다.
<1902년의 관덕정--당시의 쓰러져가는 대한제국 망국의 모습을 보는듯 씁쓸하다>
탐라순려도에 나타난 관덕정은 지붕마루를 양성(陽城)마루로 하였고 용마루 양단(兩端)에는 커다란 장식기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02년께에 촬영한 사진과 해방직후인 1946년에 촬영한 사진을 비교하면 처마내밀기가 다르다. 이는 1924년 일본인에 의해 9번째 중수를 하면서 처마를 2척이나 줄여서 보수하였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이때는 이미 지붕마루에 양성과 장식기와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제9차 중수에서 처마길이가 15척에서 2척이나 줄여지면서 전체 규모에 비해 처마길이가 짧아 관덕정의 입면상 비례감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물론 이로 인해 비바람에 의한 목부재의 부식이 진행됐다.
<1946년의 관덕정.1924년 제9차 중수이후의 모습. 처마가 2척 잘려나가고 벽체를 둘렀다>
1969년 제10차 중수때 잘려진 처마를 원상복구하려 했으나 이때는 이미 남측면에 도로가 있어 처마를 원상복원할 경우 차량통행에 지장이 있어 못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었는데 제주시는 지난 2003년 12월부터 2006년 8월까지 32개월간의 제11차 복구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했다.
<1962년의 관덕정 모습. 이때는 다시 벽체를 걷어냈다>
제11차 중수에는 82년전에 제9차 중수때 잘려나간 2척의 처마를 복원해 상실했던 입면상 비례감을 회복했으며 내부에 있던 8점의 벽화도 복원했다.
<1969년 당시의 관덕정>
이처럼 관덕정은 처음 건축된후 여러차례의 중수과정을 거치면서 초기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관덕정의 주변에는 동측 정면쪽에 월대(月臺)를 두었고 서측 배면측에는 선덕대(宣德臺)를 두었다. 이들 세 개의 공간은 석축을 축조하여 동서축으로 긴 장방형 배치를 하고 있지만 개별공간들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다.
1880년께의 사진과 비교하여 보면 사진속에는 월대는 동측 전면 3개소에 장대석 계단 시설이 있으나 현재는 중앙부분만 계단시설이 남아있고 남측면에는 계단석으로 보이는 디딤돌이 아스콘 포장에 덮혀 상부면만 노출되어 있다.
석축은 장대석을 사용하여 바른층쌓기를 하였는데 전면 석축의 지반선을 보면 중앙부분이 가장 높고 양쪽으로 갈수록 지반선은 낮아져 중앙계단 주변석축은 두벌대로 보이고, 양단 모서리 부분은 세벌대로 보이는데 모서리 부분의 축대하단에는 지대석이 노출되어 있는데 지금은 아스콘 포장에 거의 덮여 외벌대처럼 보인다.
관덕정 기단 전면에도 3개소에 계단시설이 사진에 나타나지만 현재는 중앙어칸 전면에만 계단시설이 돼 있고 양퇴간 전면에는 계단시설이 사라지고 없다. 현재의 건물에는 벽체가 전혀 없지만 사진속에는 판벽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관덕정에는 현재 관덕정(觀德亭),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탐라형승(耽羅形勝) 등 세 개의 현판글씨가 걸려있다. 창건 당시에는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쓴 觀德亭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하나 언젠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선조때 우의정을 지냈던 이산해의 서체로 된 편액이 걸려있다.
또한 대들보 아래 창방 양면에는 작자 미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지금은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색, 탈색되어 있지만 도내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벽화이며 상당히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벽화들은 모두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내용을 보면 두보가 귤을 던지는 여인의 교태에도 아랑곳않고 태연자약했다는 고사를 그린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난을 피해 바둑을 즐기는 선비들을 그린 상산시호(商山四皓), 손권과 유비가 조조를 격파하는 모습을 그린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관원들의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대수렵도(大狩獵圖), 10만 대군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거문고를 타서 적군을 물리치는 제갈공명을 그린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유방에게 연회를 베푼뒤 역습하려다 후환만 얻은 항우를 그린 홍문연(鴻門宴)과 십장생도(十長生圖)이다.
<원래의 안평대군의 관덕정 글씨는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선조때 우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서체 편액>
관덕정은 세워진후 500여년의 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항상 도민과 살아 숨쉬어 온 역사의 현장이다. 관덕정 앞마당은 창건 당시부터 연무장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활쏘기 시합을 하게 되면 목사와 판관 등이 이 정자에 좌정하여 시합 상황을 지켜보곤 하였다.
또한 관민이 서로 더불어 의논할 일이 있거나 큰 잔치를 베풀 때에도 이 곳에서 하였다.
특히 근대에 와서 관덕정 앞마당은 제주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01년에는 신축교란의 장두 이재수가 이 곳에서 교인들을 처형하기도 했고, 1947년 3월1일에는 3․1운동 28주년 기념식에서 미군정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섬의 역사이래 최대 비극인 4․3 발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1949년 6월에는 무장유격대장 이덕구의 시신이 광장앞에 내걸리기도 했다.
탐라시절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일번지였던 관덕정 주변은 일제시대에는 남쪽으로는 식산은행(전 국민상호신용금고 자리), 북쪽으로는 도청(島聽)․경찰서․소방서․우편국(현 제주체신청 자리), 그리고 서쪽으로는 제주읍사무소(구 시청 자리) 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5일장터로도 이용하였다.
광복이 되어서는 한 때 도청 청사로, 또 지금은 폐지된 북제주군청 청사로 활용되기고 했다.
<현재의 관덕정 모습>
그러나 지금의 관덕정 앞마당에는 이와 같은 풍운의 제주근대사를 증언할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그 흔한 기념비 조차 하나없는 관덕정 앞마당은 10여년 전에는 물을 뿜어내던 분수대를 철거했다.
그나마 다행은 제주목관아지에 대한 수년간의 발굴조사가 진행된후 지금은 목관아터에 복원작업이 이뤄져 과거 이곳이 제주의 중심지 였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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