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충의사(忠義祠)는 청주한씨 서재(恕齋)공 한천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한천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밑에서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정몽주 등과 함께 조선을 개국하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를 탄핵하는 등 공략하다 1392년 제주로 유배되는 인물이다.
그는 곧 유배가 풀렸지만 돌아가지 않고 표선면 가시리에 정착하여 청주한씨 제주입도조가 된다.
# 청주한씨 제주입도조 '한천' 1392년 유배
청주한씨 제주문중회에서 조사한 사료에 따르면 서재공은 고려 멸망과 동시에 부인과 두 아들을 거느리고 개성을 출발 정읍, 해남을 거쳐 해로로 성산포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인가가 없는 이 곳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예전의 충의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600여년된 전통올레
처음으로 집을 지어 살던 곳에 한씨 문중회에서 충의사(忠義祠)를 지어 입도 선조의 유업을 기념하고 있다. 이 주변의 지명을 보면 큰뒷밭(충의사 있는 곳), 작은뒷밭, 안위연, 동백남밭(원정착지), 외밭, 서당팟, 절구터, 사장(射場)터, 중이왓 등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충의사에는 서재공 한천유허비가 오래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입도선조인 서재공의 묘소를 찾지 못하여 당황하던 중 1953년 이웃 성산읍 신산리 고재관 씨의 꿈 속에서 계시를 받아 잃었던 묘를 찾았다고 한다.
고씨는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있던 祭閣(지금의 충의사 자리에 있었음)을 보수해 달라는 한씨문중회의 부탁을 받아 이를 수락하고 서기 1963년 2월 정성을 들여 보수작업을 마쳤다. 그런데 보수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는 온몸에 기운이 빠져 환자의 몸이 된 것 같았다. 무슨 병인지 알 수도 없고 해서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이튿날 꿈에 영감님(서재공)이 나타났다. 가시리 제각보수공사장이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마당이 나오고 정면에는 큰 기와집이 꽤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대청마루 서남쪽에 앉아 일을 시작하는데 집주인인 듯한 영감님이 나타났습니다. 영감은 내가 하는 일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집 뒤편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다. 아내는 걱정하면서 몸이 쇠약해서 그런 것이니 마음을 안정시키고 푹 쉬어야 한다고 권하였다.
한편 전날밤부터 두살난 딸이 열이 있더니만 병원에 다녀와도 효과가 없고 뒷날밤 자정쯤에 죽고 말았다. 아내는 가시리 제각공사 때문에 일어난 변고라고 하면서 연장들을 바닷물에 집어던져 버렸다. 죽은 딸을 이웃 사람과 더불어 산에 가서 묻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서 초죽음이 되어 쓰러져 잠들었는데 두번째 꿈을 꾸었다.
"홀연히 큰딸아이가 죽자 파묻으려고 딸아이를 안고 한길을 막 나섰는데 웬 노파가 길을 막아서며 하는 말이 딸아이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심코 딸아이를 건네 주었고, 노파는 딸아이를 안고 서남쪽을 향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습니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가다 보니 가시리 제각 앞에 이르렀습니다. 문간을 들어서고 보니 남향으로 지은 4칸 큰 기와집이었습니다. 노파는 아이를 안고 부엌쪽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제공 한천 유허비
아이를 찾아야겠다고 부엌엘 가 보니 십팔구세 처녀들이 흰모자에 앞치마를 두르고 떡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혼잣말로 웬 떡을 이리 많이 만드는고 하는데 전날 꿈에서 본 그 영감이 들어왔습니다. 영감이 방석을 권하며 앉으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슨 떡을 저렇게 많이 만드십니까? 하고 물으니 저 떡은 내 집 늙은이가 아이를 안고 와서 잔치를 하려고 만드는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내 딸인데 찾아가겠다고 말하니 영감은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하면서 그만한 덕(德)이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 말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있는데 서쪽 구석이 헐어서 비가 새고 있으니 네가 고쳐 주어야겠다고 부탁했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대로 돌아가고 이 다음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영감 재촉에 사립문을 나와 큰길로 발길을 옮기면서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온몸뿐만이 아니라 자리에까지 땀이 흥건히 고여 있었고 고씨는 이제 내가 죽는 것이로구나 하는 두려움에 떨다 보니 밤이 새었다. 다음날 밤에 세번째 꿈을 꾸었다.
"창밖에는 가랑비가 촉촉히 내리고 선잠이 들까말까 하는데 고재관이 있느냐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벌떡 일어나 보니 밖에 영감님이 와서 어찌 무심하게 잠만 자느냐 하면서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예 몸이 아파서 자고 있습니다 하니 아프다고 잠만 자면 되나 걸어다녀야지 그리고 내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예 지금 몸이 아파서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어서 이제 나하고 같이 가야 한다면서 영감이 문밖으로 나가기에 나도 뒤따라가려고 첫발을 내딛는데 깨어 보니 꿈이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영감이 내 잠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보니 필경 곡절이 있기는 있겠구나'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틀 후에는 네번째 꿈을 꾸었다.
"내가 가시리 마을을 막 들어서는데 영감이 길을 막아서고는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영감님의 명령대로 그 뒤를 좇아 마을 서남쪽으로 가로질러 곧장 걸었습니다. 앞서가는 영감님이 서너발쯤의 거리인데 아무리 힘을 내어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넓다란 초지가 나왔고, 그 동북쪽으로 외산담한 묘가 있었고 묘 앞에 큰 돌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묵묵히 앞서 가고 있던 영감님은 저 외산담한 묘와 돌멩이를 잘 보아 두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참 걷다가 보니 오른편으로 동산이 있고 동산 건너편으로 넓은 초원이 전개되었는데 멀리 외솔나무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 소나무 옆을 곧장 걷다 보니 편평한 띠밭이 나왔고 띠밭 담벽에 붙어 오름이 하나 있어 영감을 따라 담벽을 뛰어넘으니 앞서가던 영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충의사
나는 길 표적을 해 두라는 영감의 말대로 표적을 하려고 높은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동산 동남편 양지바른 곳에 옛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무덤 서남쪽에 타다 남은 '맹개낭' 한 뭉텡이가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방묘(方墓)에 제절 만들 때 썼던 것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하 영감님이 여기 살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그래서 나보고 집을 고쳐 달라고 했구나 하면서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표적을 해 둔 방묘가 서재공 할아버지 묘가 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충의사 경내 비석들
그 후부터는 꿈도 꾸지 않고 몸도 좋아졌으며 애들도 건강하게 자라는 등 모든 일들이 마음먹은 대로 풀려갔다. 이러한 말이 나자 한씨문중회에서 찾아와서 꿈속에서 본 것을 참고로 선묘를 찾아 달라고 했다. 꿈속의 방향을 따라 옛 무덤을 찾았는데 땅속에서 옛 비석을 찾아냄으로써 서재공의 무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표선면향토사․71~75쪽)
입도조란 수령이 파견되던 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인데 제주에 유배와서 입도조가 된 이들은 이외에도 많이 있다. 제주도 외에도 진도나 완도 등에도 입도조가 존재한다.
제주의 토착성씨인 고씨, 부씨, 양씨(가나다 순)를 제외하면, 제주의 성씨는 모두 다른 지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제주에 들어와 정착했든, 그 후손들은 제주에 최초로 정착한 선조를 입도조라 칭하였다.
제주 입도조 가운데는 유배된 사람들이 많은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조선개국에 반대해 유배된 한천을 비롯해 역시 급진개혁파에 반대해 곽지리에 유배온 김만희(金萬希)는 김해김씨 좌승공파의 입도조가 되며 이미(李美)․ 변세청((邊世淸)․허손(許遜) 등도 조선개국에 반대한 이유로 제주에 유배되었는데 각각 경주이씨 익제공파․원주변씨․양천허씨 입도조가 되었다.
# 조선 개창을 반대하다 유배온 이미, 김만희, 한천 '삼절신'
조선개국에 반해해 제주에 유배됐던 이들중 한천․김만희․이미를 지칭해 제주에서는 끝내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삼절신(三節臣)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중 이미의 제주유배는 뜨거운 형제애를 느끼게 해준다. 이미는 '익재난고','역옹패설'등을 저술한 이제현의 증손으로 조선 태종때 유배오는데 형 이신(李伸)은 이런 동생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제주도 수령을 자원한다. 형은 동생에게 어떻게 이렇게 거친 곳에서 살겠느냐고 말하자 이미는 정몽주의 단심가처럼 불사이군의 충정을 시한수로 응답한다.
애월읍 곽지리에 있는 김만희 묘역
형은 이런 동생의 뜻을 꺽지 못하고 강제로라도 출륙시키기 위해 세 번이나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기상악화로 번번히 실패하자 안무사 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제주를 떠나는데 유배된 동생이나 동생을 돕기위해 수령을 자원하는 형의 이야기 이면에는 지식인의 비장한 상반된 고민이 깔려 있음과 함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또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신덕 왕후와 사촌지간으로 전라감사에 있던 강영은 1402년 제주도 함덕에 유배되었고 신천강씨 입도조가 된다.
고부이씨 입도조인 이세번은 조광조의 무죄를 호소하다가 중종 17년(1522)에 대정현 신도리에서 유배생활을 하는데 7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병을 얻어 제주에서 사망하자 병 간호를 위해 제주에 왔던 가족들은 제주에 정착하여 고부이씨 입도조가 되었다.
1901년 대정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재수의 난의 이재수는 이세번의 12대 후손이며 4․3당시 좌익계 거물로 활동했던 김달삼(본명 이승진)도 그의 후손이다.
인목대비의 폐모를 반대하다가 제주에 유배된 이익(李翼)은 제주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고홍진․김진용․문영준 등 제자를 길러내어 제주 교육발전에 막대한 역할을 행하였다. 그는 제주에서 아들을 낳아 경주이씨 국당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 유배인 후손들 입도조가 되어 제주도내 성씨 다양성 조성
광해군 때에 제주에 유배된 김응주(金膺珠)는 제주에서 소실을 맞아 자손을 낳고 유배에서 풀리자 되돌아가는데 그의 아들은 제주에 남아 김해김씨 사군파의 입도조가 된다. 당시 김응주는 제주목사 김여수와 친척이었으므로 유배생활 중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제주에 유배된 박승조(朴承祖)는 아들 박자호를 데리고 제주도 곽지리에 정착하여 유배생활을 하다가 유배가 풀리자 본인만 돌아갔다. 따라서 그의 아들은 제주에 뿌리를 내려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왕족이었던 회은군 이덕인(李德仁)은 심기원 등이 인조를 거부하고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데 당사자로 연루되어 1644년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645년에 서울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일찍이 그의 서자 이팽형(李彭馨)이 현실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제주에 들어와 은둔 생활을 하다가 아들을 낳아 전주이씨 계성군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현종 때에는 이지달(李枝達)이 서인과 남인의 예송 논쟁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제주에서 소실을 얻어 아들 이보운을 낳았다. 유배에서 풀리자 그는 아들을 남기고 본인만 올라가게 되면서 수안이씨의 입도조가 되었다.
숙종 때의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유배된 김예보는 유배에서 풀렸지만 돌아가지 않고,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여 김해김씨 회의공 김경서파의 입도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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