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170 사라악 - 그 처연한 아름다움에 넋놓다 너무나 화창한 가을날이다. 끝을 보이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무덥던 한여름의 무더위도 이제는 한풀꺾인 듯한 날씨이다. 그동안 더운 날씨 탓에 가지못하던 답사를 약 3개월만에 재개하게돼 기쁜마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이제 우리회원도 많이 늘어 8명이나 됐다. 또한 오늘 처음 합류한 회원도 있다. 서로가 스스로 좋아서 참여한 회원들이라 적극적으로 행하고 마음맞게 같이 다니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모두 모인 것은 6명, 2명은 개인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참가하고 싶었어도 나름대로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의 답사일정을 사라오름, 선돌, 아부오름, 가시리 충의사 등으로 잡아 본다. # 아직도 자랑(?) 스럽게 명명되는 군사쿠데타의 잔재 '5.16도로' 차는 5.16도로를 따라 아기자기하게 .. 2011. 10. 19. 어느 몰락한 왕조의 무덤이기에... 왕자묘로 불리는 무덤군은 서귀포시 하원동, 방애오름 북쪽 '여가밭'이라는 작은 동산에 있는 분묘군(墳墓群)으로, 행정 지번(地番)으로는 서귀포시 하원동 산 21번지에 위치한다. 지리적으로는 법화사 앞에서 동쪽으로 900m 지점인 폭낭르에서 시멘트 포장된 농로를 따라 뜬내를 건너서 1500m 올라간 곳에서 동쪽을 보면 비닐하우스 있는 과수원이 있는데 그 과수원 북쪽 동산이다. 이 傳왕자묘에 대한 기록은 이원진의《耽羅誌草本》,《大靜郡邑誌》, 김석익(金錫翼)의《心齎集》,이응호(李膺鎬)의《탁라국서(?羅國書)》에 기록돼 있다. 이 기록들 모두 왕자묘를 현재의 하원동 산 21번지를 가리키고 있으며, 거리에 대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傳)해오는 왕자묘는 누구의 묘인가가 중요한데, 지금까지 이 묘가 누구의 .. 2011. 10. 19. 천년세월 탐라왕국의 무덤 제주시 화북동 거로마을 능동산 성주묘(星主墓.추정) 제주시에서 동부산업도로로 들어가는 길목의 네거리를 곧 지나면 남쪽으로 황세왓, 북쪽으로 거로마을로 갈라지는 좁은 네거리가 있다. 여기서 거로쪽으로 들어가면 거로교(巨老橋)가 있고 다리에 붙어서 오른쪽으로 비탈진 농로가 있는데 비탈길을 내려가면 바로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왼쪽 길을 따라 100여m 가면 길이 끊기고 감귤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밭 안의 통로를 따라 100여m 되는 곳까지 가면 창고가 보이고 창고 북동쪽 동산에 성주묘로 추정되는 묘가 자리잡고 있다. 성주(星主)란 탐라왕국의 왕의 호칭이었다. 즉 성주묘는 탐라왕의 왕릉을 뜻하는 것으로 거로마을 능동산의 성주묘의 주인공은 고봉례(高鳳禮)와 그의 부인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알려지고 있다. 고봉.. 2011. 10. 19. 신천강씨 제주입도조 강영 조천에서 중산간도로로 가는 길 오름밧(봉소동) 바로 남쪽 길 옆에 '監司公墓域'이라는 표석이 있고 그 옆에 '진화문(進化門)'으로 들어가면 강영(康永)의 묘가 있다. 강영은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씨(신덕왕후)의 4촌 오빠로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의 난) 당시 전라감사로 있었다. 방원의 난으로 세자 방석과 방번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 일은 조선 태조 7년(서기 1398)의 일이고 그 외삼촌인 강영은 4년후인 태종 2년(서기 1402) 제주도로 귀양을 오게 된다. 강영은 함덕지경에서 제주고씨 소실을 맞아 정(禎)․복(福)․만(萬) 세 아들을 낳아 신천강씨 제주 입도조가 되는데 지금도 함덕에는 강영이 유배올 때 상륙한 곳이라 하여 강영개라 불리는 곳이 있다. 신천강씨 제주 입도조 강영의 묘역 하지만 재미 있는 .. 2011. 10. 19.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 조선의 역사에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같이 회자되는 선비도 드물다. 부패한 권력층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냥했다가 훈구파의 반격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음에 이른 사림파의 리더 조광조는 이상적인 자치 국가를 꿈꿨던 조선의 개혁 정치가였다. 기묘사화는 중종반정과 관련이 매우 깊다. 조선의 스물일곱 명의 임금 가운데 왕위에서 쫓겨나서 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복권이 안된 두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되면서 광기로 변한 연산군의 폭정은, 이를 참다못한 신하들에 의해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끝을 맺는다. 마침내 크고도 깊었던 연산군 폭정의 상처는 유교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대의명분으로 성리학을 중흥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때 신진사류의 대표적인.. 2011. 7. 2. 4.3의 아픈 흔적을 찾아 차는 서부관광도로를 힘차게 달리더니 동광검문소로 미끄러지고 있다. 헛묘는 지금의 동광리 검문소 6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창천으로 빠지는 길과 대정쪽으로 연결된 길 사이의 삼각지점에 있다. 헛묘를 찾아가 보니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백일홍만이 이곳에 묻히지도 못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 같다. 시신도 없어서 유품만 묻은 헛묘, 제주사람은 두 번 호사 하는데 그것이 혼인할 때 뭇사람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것이고 죽어서 꽃상여를 타고 가족과 친지들의 눈물속에 이승을 떠나는 것인데 그 호사도 못누렸으니 그 말못할 아픔에 코끝이 찡해 온다. # 시신도 못찾아 혼만 묻은 헛묘......한번 호사도 못하고 이곳 헛묘에 묻힌 사람들은 무등이왓 사람들이다. 4.3당시 수만이 죽어가던 시절에 시신을 못찾아 묘만 묻힌 곳이 .. 2011. 6. 26. 이전 1 ··· 20 21 22 23 24 25 26 ··· 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