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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이야기 제주역사

오현단 배향인물 선정의 아이러니

by 여랑 2011. 4. 30.

오현단은 제주에 파견된 수많은 관리와 유배객중 제주의 문화와 사상, 정신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낀친 5분을 가려뽑아 그들을 기리기위해 마련한 곳이다.

오현단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인 선조 11년(1578년) 제주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을 추모하여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를 건립한 것이 시초인데 충암묘는 이로부터 80여년후인 효종 10년(1659년) 귤림서원으로 현액된다.

그후 현종 6년(1665년) 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지금의 오현단(구 오현학원 자리)으로 옮겼으며 4년후인 현종 10년(1669년)에는 동계 정온과 청음 김상헌을 함께 배향했고 숙종 4년(1678년) 규암 송인수, 숙종 21년(1695년)에 마지막으로 우암 송시열이 배향됨으로써 오현이 갖춰진다.

 # 김정.정온.김상헌.송인수.송시열 배향

 

귤림서원은 고종 8년(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된후 터마저 잊혀져갈 무렵인 고종 29년(1892년) 도내 유림들이 귤림서원에 배향했던 오현을 기리는 제단을 마련해 오늘에 있는 곳이다.

 

오현단에 배향된 인물중 김정과 정온, 송시열은 유배객이었고 김상헌과 송인수는 관리였다. 김정은 중종 15년(1520) 8월에 제주목으로 유배와서 이듬해인 중종 16년(1521)에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사망한 인물이고 정온은 광해군 6년(1614년) 대정현에 유배되어 10년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떠났으며 송시열은 숙종 15년(1689년)에 100여일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 임명받고 부임도 않은 송인수 배향은 최대 아이러니

 

또한 송인수는 중종 29년(1534년) 제주목사에 임명됐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는 않은 인물이고 김상헌은 선조 34년(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를 다녀갔다.

그런데 의아스러운 것은 오현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중 동계 정온을 제외하고는 제주에서의 관리로서의 생활이나 유배객으로서의 생활이 길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송인수는 목사에 임명됐으나 제주에 부임하지도 않았으며 김상헌도 잠깐 안무어사로 다녀간 것뿐이고 송시열도 불과 석달을 조금 넘는 기간, 김정도 1년도 채 못넘기고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하다.

 

김정보다 2년후인 1522년 제주에 유배와 7년 동안을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고 인종대에 조광조, 김정과 함께 복원됐던 이세번도 포함되지 않으며 광해군때 유배와 5년동안 생활하면서 김진용이란 걸출한 학자를 배출한 이익도 배제됐고 헌종때 대정현에 유배와 9년동안이나 적거했던 추사 김정희도 배향되지 못하는 등 이름만 들어도 걸출한 유배객들이나 명망있는 관리들도 오현단에는 배향되는 영광을 안지 못했다.

                                                     1932년쯤의 오현단 모습

# 오랜 기간 제주에서 유배생활 한 이익.김정희 등도 빠져

 

오현단 남측으로는 옛날 제주읍성의 일부인 남수각 부분이 150m 정도 복원돼 있는데 보존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특히 제주읍성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3년간 실시된 산지포구 앞바다를 매립할 때 성곽의 돌을 가져다 쓰면서 크게 훼손됐다고 전해진다. 

오현단과 제주읍성은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녀 도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연중 대부분 관광객이 찾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고 여름에는 노인들의 내기장기나 돈걸고 하는 윷놀이를 하는 장소로 전락됐으며 밤에는 청소년들이 주로 이용하는 형편인데 낮에도 막걸리나 소주병이 나뒹굴고 상쾌하지 못한 냄새가 진동한다.

 

문화재나 유적들은 그것들을 찾는 사람들의 인식수준 만큼의 가치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래서 한 나라의 문화유적의 보존과 주변 등을 살펴보면 그 나라나 지역주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수준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느정도 수준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