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무수천에서 중산간으로 가는길과 중문-서귀포로 가는 평화로의 갈림길에서 중산간으로 길을 잡고 광령리를 넘어서면 고성리에서 항몽유적지를 만날수 있다.
항파두리성은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였던 최후의 보루였다. 고려중기 무신들이 문신들을 밀어내고 조정을 틀어쥐어 60여년간을 좌지우지 했다.
이의방으로 시작된 무인정권은 정중부와 이의민, 경대승, 최충헌, 최우 등을 거쳐 몽고침략을 맞으면서 막을 내린다.
삼별초는 그 탄생을 무인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대에 야간 경비를 하던 부대로 '야별초'가 있었고 이 야별초는 후에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다.
고종 18년(서기 1231)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그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고려군이 기회를 보아 탈출하여 오자 이들을 별도로 모아 '신의군'이라고 하였는데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합하여 삼별초라 불렀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보존된 삼별초의 유적인 토성
삼별초는 그 당시 특수정예군이었으며 국내치안유지, 친위대, 몽고군과의 싸움에 있어서 전위대 역할을 하였다.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고종 19년(서기 1232)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고 끈질긴 항쟁을 하였으나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원종 11년(1270년) 다시 조정을 개경으로 옮기고 몽고와 화의하게 된다.
이에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불복하여 승화후 온을 왕으로 받들고 고려와 몽고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원종 11년(서기 1270) 삼별초는 1000여척의 배에 사람과 물자를 싣고 진도로 가서 용장성을 쌓고 항전하였으나 이듬해인 원종 12년(서기 1271) 5월15일에 고려 장수 김방경과 몽고 장수 흔도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용장성은 함락되고 배중손과 승화후 부자는 전사한다.
배중손 휘하의 장수였던 김통정(金通精) 등은 용장성이 함락되자 진도를 탈출한 사병을 거느리고 탐라로 들어와서 재기를 다짐하는데 한라산 북서쪽 귀일촌(貴日村)에 외성인 토성을 쌓고 내성은 돌로 성을 쌓으니 이것이 항바드리성이다.('항파두리'라는 말은 이 고장 지명 '항바드리'를 한자말로 옮겨적은 것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곳 항바드리 윗 지경을'장태코'라고 부르는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흐를 때면 지형이 마치 장태코에서 물이 흐르는 것과 같고, 그 아랫 지경은 장태코에서 내리는 물을 받는 큰 물항아리처럼 생겼다 해서 항바드리란 지명이 붙여졌다.
이외에 애월포에는 목성(木城)을 쌓고 하귀포를 군항(軍港)으로 삼았다. 지금 동귀리를 군항동(군냉이)이라 함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 지금의 애월읍 동귀리 옛 지명 군냉이는 대몽항쟁 시절의 유래
성의 규모는 외성인 토성의 둘레가 15리이며 성내에는 백성들을 살게 했고 석축을 한 내성에는 관아를 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은 지대가 높고 동서로 하천이 있어서 천연적 요새를 이룬다.
또 성밑에는 '구시물'이라는 수량이 풍부한 샘물이 있어 식수의 확보가 용이하였으므로 이 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김통정은 탐라에 들어와서 항바드리성을 축조하는 한편 진용을 정비하자 본토 공격에 나선다.
그들의 공격 목표는 첫째 몽고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건조하는 병선의 파괴, 둘째 송경(松京)으로 수송하는 공미와 그 수송 선박 탈취, 셋째 몽고인과 몽고에 협조하는 관원 및 조선공(造船工)의 납치 등이었다.
이에 원나라는 원종 13년(서기 1272) 12월 탐라 공략을 위한 동원령을 내리고, 군사 6000과 뱃사공 3000명을 동원한다.
대장군 김백균(金伯鈞)을 경상도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 판합문사 이신손(李信孫)을 충청도 방호사로 임명하여 해상 경비를 엄하게 하면서 탐라 공략의 시기를 이듬해인 원종 14년(1273) 3월로 정하여 진행했다.
원종 14년 2월에 홍다구는 원에서 돌아와 다루가치(達魯花赤) 이익(李益) . 마강(馬降) 및 고려 조정과 함께 탐라 공략을 의논하였다.
왕은 김방경(金方慶)에게 월(鉞 도끼, 왕명을 받은 지휘관의 상징)을 내려 정예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내려가게 하였다.
동년 3월말에 여몽 연합군 1만명은 반남현(潘南縣․지금의 나주)에 집결하고 삼별초 정벌을 시작한다.
김방경은 4월9일에 160척의 전선에 나누어 타고 출발하여 삼별초의 요새가 한라산 서북 밑에 있다 하므로 정면 공격을 하면 희생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하여 삼별초를 양단작전(兩斷作戰)으로 유인했다.
즉, 배 30척에 풀을 가득 실어 불을 켜고 전선으로 위장하여 명월포 앞바다로 진격하게 했다. 이를 본 삼별초는 여몽군이 명월포로 상륙하는 것으로 알고 김통정 이하 장수들이 명월포로 출진했다.
김방경은 스스로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4월28일 함덕포로 상륙했다. 이 곳을 수비하던 삼별초 이시화(李時和) 등은 죽기를 각오하고 언덕 사이에 복병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함덕 방어선은 무너지고 만다.
# 42년여의 대몽항쟁은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고
상륙에 성공한 김방경은 서진을 재촉하여 지금의 동귀리 남쪽에 있는 파군봉(破軍峰) 전투를 승리한뒤 항바드리성을 공격했다.
한편 명월포 앞바다로 나갔던 선단도 회항하여 귀일포로 상륙하여 김방경과 합세했다.
맹렬한 화공(火攻)을 앞세운 여몽연합군의 공세에 삼별초는 김원윤, 김윤서 등이 필사적으로 맞섰으나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김통정은 얼마안되는 나머지 부하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 붉은오름(赤岳)에 진을 친후 5월6일 출사제(出師祭)를 올리고 여몽군에 도전하니, 김방경은 송보연을 선봉장으로 총공격을 했다.
양군의 혈전으로 오름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 용장 이문경, 김혁정 등도 분전하다 전사했으며 김통정도 장수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분전했으나 기진맥진하여 산중으로 퇴각했고 부인과 함께 자결한다.
이로써 고종 18년(서기 1231) 이래 42년간의 삼별초 항몽혈투사(抗蒙血鬪史)는 막을 내리게 된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토성, 장수물, 구시물, 돌쩌귀 등이 있고, 대궐을 지었던 자리에는 '항몽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 금산공원(錦山公圓)
항파두리를 뒤로하고 계속 서쪽으로 6km쯤 내달리면 장전리, 용흥리, 상가리를 거쳐 납읍리가 나오는데 여기에 금산이라는 난대림 공원을 만나 볼 수 있다.
금산공원은 1670년경 주변 외곽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마을 중앙으로 모여들어 살기시작하면서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즉 지금의 마을중심에 모여 살게 되었는데 남쪽에 거대한 암석이 노출되어 있어서 미관상 불쾌하기도 하지만 마을에서 위로 처다보면 한림읍에 있는 금악봉의 화체(火体)로 보여서 주민들의 마음이 불편했다.
이에 따라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금산(錦山)에 나무를 심어 흉하게 보이는 화체를 막지 않으면 화(火)의 재해를 면키어렵겠다고 하는 풍수지사의 말에 따라 조림하였다.
금산공원에 조성된 산책로
첫째 재해를 막고 둘째 미화하고자 하는 의견이 모아져서 이 공원에 나무를 심는 한편 일체의 방목벌목 등을 엄금하여 산의 이름을 '금산(禁山)'이라 하게됐다.
이러한 예는 구좌읍 김녕리의 입산봉과 안덕면 산방산에서도 볼수 있는데 김녕리 입산봉에는 경작을 금하는 금경산(禁耕山)이 새겨진 마애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처음에는 금산(禁山)이라 불러서 단순히 나무를 보호하는 산에 불과했는데 몇십년동안 철저히 보호한 결과 난대림을 비롯하여 수많은 수목이 자라서 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에 금산(錦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난대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번 이곳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포제를 봉행하고 있는데 이곳 입구에는 송석대(松石臺)와 인상정(仁庠亭)이라는 마애명이 있다.
후인(后人) 김용철(金龍徹) 선생이라는 분이 있어 1843년 성균관 진사시 갑과문과에 급제하여 제주 삼읍 삼향교도강사를 하였다. 제자들이 여름에는 이 공원에 있는 인상정과 송석대에서 강의를 듣고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상정은 이 고장 출신의 한학자인 현일락이 1873년 그가 강학하던 교목정자밑 바위에 편액대신 새긴 마애명인데 인상정은 현일락의 호이다.
인상정이 새겨진 바위는 세월이 흐르면서 깨어지고 말아 그 조각을 시멘트로 붙여놓았고 오른쪽에 송석대가 있었다고 하나 자취나 흔적은 없고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주위에 5언절구 한수가 새겨져 있으나 지은이와 연대를 알 수가 없다.
# 탐라왕자후문공지묘
납읍리사무소 부근 큰길가에 화려한 비석을 세운 큼직한 묘소가 있고, 그 앞 산담 밖 길가에는 옛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耽羅王子后文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조면질 현무암을 잘 연마하여 세운 비석의 크기는 높이 111cm, 폭 61cm, 두께 26cm이며, 높이 101.5cm 윗 부분은 둥글게 다듬어졌다.
비석은 아직도 글씨가 마멸되지 않고 충분히 읽을 만한데 후손들이 위선사업(爲先事業)을 하면서 비석을 새로 세우게 되자 옛 비석은 산담밖에 세워 둔 것으로 보인다. 비의 뒷면과 오른쪽 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혀 있다.
[古之人觀德於世室而又有積善之墓(?)〃與室 '世享則一也夫德善 於文公庶可以觀乎公耽羅王子之后其先降于南平羅朝大匡輔國三韓壁上功臣諱多省 三光世〃趾美麗朝思簡公□諱承王命入耽羅敎民禮□事見寒暄堂集□玄孫昌祐封王子五世襲位我國初諱忠世獻爵土受都知管三世政鄕大夫寔有永遠矣今□□碑而問於 日吾先南渡以後得傳墓所者□旨松洞其次兩世幼(?)邑而諱岐鳳鄕大夫配金海金氏諱御周鄕大夫配晋州姜氏四瑩同域一碑表阡難以題額云如之何曰亦吾未□然從來天子題古墓之法碑可立於域中而表之則庶或可乎子忠男參奉陞通政孫貫道顯道載道弘道繼道承道得道嗚乎公之墓歷世□飯□於世室雲仍蕃衍豈非德善之所資也哉墓納邑里大街南巳作後孫一同 廟正李膺鎬撰 前敎員張聖欽書 光武后丙子春謹竪〕
1986년 묘 앞에 새로 세운 비석에는 〔公의 姓은 文이요 本貫南平이며 諱는 岐鳳이시니, 始祖 新羅 三重大匡輔國上柱國三韓壁上功臣大司馬大將軍兼太師太傳武成公 諱 多省의 三十三世孫이시고, 入島祖 高麗大提學 上柱國平章事加那君司簡公 諱 綽의 十五世孫이시며, 耽羅王子諱 昌祐의 十一世孫이시고, 耽羅最後의 王子諱 忠世의 七世孫이시다. ‥‥ 中略 ‥‥ 公의 墓는 配位와 함께 이곳 涯月邑 納邑里 一五六八번지의 一 大路上田 巳坐인데 瑩域內에 次子 御周 同配 晋州姜氏를 同坐로 인바 묘비는 지나간 丙子年春에 謹竪하였으나 年久하였기로 ‥‥ 下略〕
이 비석은 개인적인 묘에 따른 비석이지만 탐라왕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데서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光武后丙子年은 서기1936년이다. 비문을 지은 이응호는 조설대 집의계원 12인 중 한 사람인 듯하다.
차는 납읍리를 떠나 해안으로 향한다. 애월읍 하귀리에서 애월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시원한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 많은데다 고내리~애월리 구간은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았던 환해장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구간이다.
환해장성은 제주의 해안선을 따라 300여리에 축성된 성이다. 환해장성은 고려 원종 11년(서기 1270) 김 수․고여림이 삼별초의 입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 같다.
전반적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들이 삼별초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개경정부가 삼별초의 제주진공을 염두에 두고 제주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는 시점은 원종 11년(서기 1270년) 8월 삼별초의 진도정부 수립이후로 봐야 하는데 제주는 같은해 11월 삼별초군에 의해 무너졌다.
고려 조정은 진도 공격에 앞서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전한 후 탐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원종 11년(서기 1270) 9월에 영암부사(靈巖副使) 김수(金須)에게 방위군 200을 주어 탐라를 수비하도록 했다.
이어 장군 고여림(高汝霖)에게도 군대를 주어 탐라 수비에 가담하도록 했는데 그들은 탐라 수비를 위해 도민을 동원하여 환해장성(環海長城)을 쌓기 시작했다.
한편 진도의 삼별초도 관군이 탐라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11월 별장 이문경(李文京)에게 명하여 탐라를 점령하도록 했다.
이문경은 관군을 송담천(松淡川)으로 유인하여 복병술로 반격하니 고여림은 불의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고 관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문경은 명월포에서 조천포(朝天浦)까지 교두보를 확보하고 탐라를 지배했다.
특히 축성을 맡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고여림은 동년 9월4일 진도공격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고려사'에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면 고여림은 빨라야 9월말이나 돼야 제주에 파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원형이 보존돼 있는 애월읍 고내리에 있는 환해장성
그로부터 삼별초군에 의해 고여림이 패전하고 제주가 함락된 11월과는 불과 한달 남짓 밖에 되지 않는데 이 사이에 축성을 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환해장성은 이문경 등이 제주를 장악한후 시작됐거나 아니면 원종 12년(서기 1271년) 5월 진도 용장성이 함락된후 김통정 장군 등이 제주로 들어온후 몽고군의 공격을 대비해 쌓기 시작했다는 추론이 설득력을 갖는다.
더구나 지금 남아 있는 환해장성들은 조선시대 후기에 보수된 것이 확실하다.
이는 조선 헌종 11년(1845) 6월 영국 선박 1척이 우도 앞바다에 1개월이나 정박하여 삼읍의 연안을 측량하고 돌을 모아 회를 칠하여 방위를 표시하는 등의 행위를 본 목사 권직이 그해 겨울 도민과 군사를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크게 수축했다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 해안에 남아 있는 자취는 바로 이 때의 것이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곳은 제주시 화북동과 삼양동 사이, 성산읍 온평리와 조천읍 북촌리, 한림읍 귀덕리, 구좌읍 하도리 그리고 이곳 고내리 등이다.
온평 부근 해안에 남아 있는 것은 약 2Km로. 성산포를 중심으로 해서 서귀소(消)까지 이르는 곳곳에 해안 성곽이 축성되어 있는데 완전하게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없고 거의 반파 또는 도피 유실된 상태이다.
하도 환해장성은 하도리 토끼섬 서쪽 해안도로가 세화쪽으로 연결되기 시작하는 지점에 있다.
길이는 100여m로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고, 형태면에서도 전형적인 장성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밭담을 조금 높고 두껍게 쌓은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행원리 환해장성은 행원-한동 사이의 바닷가에 3개 지점에 나누어져 있으며 북촌리 환해장성은 마을 동쪽 동복리 경계로부터 용물이 있는 곳 선진수산에 이르는 약 500여m 구간이다. 고두기엉덕 입구에서 맞은편으로 내려가면 바닷가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보인다.
부분적으로 무너진 곳이 있지만 온전하게 보존된 곳도 있어서 장성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짐작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무너진 곳은 대부분 바깥쪽이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2.5m 정도이고, 너비는 2m 정도로 넓은 곳과 1.2m 정도로 좁은 곳이 있다.
화북 환해장성은 삼양3동 검은여쪽 500여m, 화북1동 연대동산에서 삼양3동 버렁마을까지 약 1Km, 화북 포구 서쪽에서 베릿내 하구까지 약 800여m 등 세 부분으로 나뉘며 애월 환해장성은 애월리 너븐여~배무숭이~가림돌로 이어지는 약 500여m 구간이다.
귀덕리 환해장성은 약 500m 정도가 남아 있는데, 성 위의 폭은 1m쯤 되며 성 안쪽에는 폭 1.5~2m, 높이 1m 정도의 段(군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어 환해장성의 축조 양식을 알아볼 수 있다.
환해장성은 문화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지난 1998년에야 문화재로 지정됐다. 현재 제주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환해장성은 애월․화북․삼양 환해장성 등 10개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고내․조천․하도․태흥 환해장성은 이미 원형이 크게 훼손됐다. 지난 96년 제주도는 제주의 대표적 환해장성인 고내리 환해장성에 대한 조사까지 실시했지만 문화재지정 등 후속조치는 취해지지 않고 있다.
특히 갖가기 이유로 복원사업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나마 70여m를 복구한다고 실시된 온평리 환해장성은 원형을 완전히 무시한 채 벽돌로 담장을 쌓듯 만들어 오히려 복원을 안한만도 못하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더구나 최근 급속하게 늘어난 양식장 취배수관 공사와 해안도로 개설로 인해 장성의 훼손은 가속화됐으며 일부 구간은 훼손된 부분을 복원하면서 원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임의대로 쌓고 괴석을 이용하여 성 위에 조경까지 함으로써 문화재 훼손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던 사랑은 산산히 부서지고
차는 애월항을 뒤로하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내달린다.그렇게 달리기를 한참 지나서 도착한 곳이 한경면 용수리 절부암.
제주의 여인들은 때로는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 옛날 차귀촌(지금의 한경면 고산리 자구내포구)에 고씨 성을 가진 처녀와 강사철(姜士喆)이라는 총각이 살았다.
둘은 너무너무 사랑하여 고씨 처녀가 열아홉 되던 해에 혼인하였으나 너무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날 남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테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대를 베러 섬으로 갔다고도 함 ; 오성찬, 제주토속지명유래. 128쪽) 아침 출발할 때는 괜찮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광풍이 불어 결국 남편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아내 고씨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남편의 시체만이라도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생각하며 기다린 지 석달만에 고씨는 소복으로 단장하고 속칭 엉덕동산 절벽의 커다란 팽나무에 목을 매었다. 그러자 바로 그 다음날 아내가 목매어 죽은 바로 밑에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서기 1866년(고종 3년) 대정 판관 신재우(愼哉佑)는 관비로 두 시신을 합장하여 장례를 치러주고 고씨가 목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명명하고 마애명을 새겼다.
한경면 용수리에 있는 절부암
또한 제사 비용 충당을 위해 제전(祭田)을 마련해 준 뒤 매년 1회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용수리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고씨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들 부부의 묘는 당산봉 밑에 있으며 매년 벌초하고 있다.
현장에는 신재우 판관이 자연석에 새기도록 한 【節婦岩】이란 음각이 깊게 남아 있고 윗줄에는 '監동(艸 밑에 아이童) 金膺河 書 洞首 李八根 刻'이라고 씌여 있으며 다른 마애명 몇 자가 같은 자연석 뒷편에 남아 있다. 맞은편 바위에는 '判官 愼哉佑 撰'이 새겨져 있다.
절부암은 전서로 썼고 감훈한 이들의 이름자와 년호는 예서로 썼다. 절부암은 도내에 있는 마애명중 유일한 전서 애각으로 판관 신재우가 게액했으며 김응하가 쓰고 동수인 이팔근이 조각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절부암 암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늙은 200년 된 희귀수목인 박달목서 3그루가 자라고 있다.
박달목서는 암수 딴그루의 나무로 오랫동안 숫나무들끼리 노총각 신세로 지내오다가, 제주대학교 김문홍 교수가 거문도에서 종자를 따다가 이를 번식시켜 1995년 6월14일에 암나무 30그루를 옆에다 심어 주어 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 비움의 마음없이 행복은 가까이 오지 않는다
우리는 절부암에서 돌아오는 길에 금릉에 있는 자연산 우럭만을 고집하는 식당을 찾았다. 금릉 마을회관 서쪽에 위치한 이 식당은 노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실내가 10여평에 불과하지만 손님은 항상 많은 집이다.
이제는 주변에 많이 소문이 나서 신창에서도 점심을 먹으러 올 정도로 붐비는 식당이 돼 버렸지만 아직도 번듯한 간판하나 달지 않은 곳이다.
서쪽으로 나올때면 자주 들르는 곳인데 그 이유는 이 집의 음식이 맛깔수럽고 정갈스런 것도 있으나 부부의 넉넉한 여유가 마음을 푸근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집은 남편이 직접 바다에 나가 잡아다 하는 자연산만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며 그것도 우럭만을 고집한다.
그래서 매뉴도 우럭매운탕, 우럭조림, 우럭회 뿐이며 잡아 온 고기를 수족관에 넣은 후 그 것이 떨어지면 해가 중천에 걸렸는데도 문을 닫는다.
집을 찾을 때면 남편은 그물을 손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날도 그물과 어구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나오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남편에게 인사를 했다.
"덕분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덕분은요. 뭐 부족한 건 어섯수광"
남편은 미소를 머금은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오늘은 빨리 들어오셨네요"
그때 옆에서 한 회원이 그냥 가는 것이 섭섭한 듯 인사치레로 다시 물었는데 그의 대답이 현답이다.
"오늘 잡을 만큼은 잡았수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책 제목은 가물가물 했지만 그리 오래전에 읽었던 내용이 퍼뜩 떠올랐다.
한 부자가 땅을 사기 위해 어촌 마을을 방문, 여기저기 둘러보다 포구까지 왔는데 한 어부가 배 옆에 기대 누워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고기 잡으러 안나가십니까"
"오늘 몫은 벌써 다 잡았습니다"
"당신은 배를 많이 가진 부자인가 보죠"
"이 초라한 배가 내가 가진 전부입니다"
"그럼 고기를 더 잡으면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뭘 하게요"
"돈을 더 벌 수 있잖아요. 그러면 더 크고 좋은 배를 사서 먼 바다까지 가서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것이고 얼마 안가 배를 여러 척 가질 수 있잖습니까"
"그 다음은요"
"그 다음에는 편안히 쉬면서 인생을 즐기면 되겠죠"
어부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눈에는 내가 지금 뭐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그렇다, 우리는 너무 현실의 욕심에 어두워 짧은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손바닥에 움켜쥐려고 할수록 빠져나가 버리는 물처럼 돈이나 물질도 아등바등 가지려고 할수록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절감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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