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전통민속마을로 지정된 성읍리는 예전 정의현의 현청소재지였고 이에따라 성곽도 설치되었다. 정의성은 높이 4m, 둘레 756m로 세종5년(1423) 왜구 방어와 정의현 보호를 목적으로 축성했다. 태종17년 정의현감 이이(李貽)는 전라도 관찰사를 통하여 당시의 실정을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으라는 교지가 있사오나 이 곳에 합속된 4현이 한라산 남쪽에 연달아 있어 만약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는다면 호아현, 홍로현은 相去가 3식(1息은 30리)이 남짓하므로 그 곳 백성이 왕래하며 공사나 목장을 고찰하는 일 등에 있어서 그 폐가 적지 않으니 정의의 중앙지인 서촌 眞舍(晋舍)나 토산 중에서 지리가 可當한 곳에다 읍성을 설치함이 타당하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 정의현청 소재지 성산읍 고성리에서 표선면 성읍리로 옮기다
조정에서 5년 후인 세종4년(1422) 12월 도안무사 정간에 명하여 정의성을 진사리로 옮기도록 하고, 그 이듬해인 세종5년에 3읍 백성을 出役시켜 제주목 판관 김치겸이 감독하여 석축을 했다.
당시 성의 주위가 2981척이요 높이가 13척이었다. 동문과 남문이 복원되었고, 성도 대부분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성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고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성읍리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토산품가게나 음식점 간판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어 상업관광지임을 느끼게 하나 한편으로는 고목으로 서 있는 팽나무와 초가집들을 보면 제주의 원형질 맛을 음미하게도 한다.
현재 전통민속마을로 지정돼 있는 성읍리는 조선 세종 5년(1423)부터 군현제가 폐지되는 1914년까지 약 500여년동안 정의현의 현청이 있었던 소재지이다.
정의현성 남문 앞 모습
제주지역이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으로 나눠지기는 태종 16년(1416) 오식 목사때인데 이때 정의현의 현청은 성읍이 아니라 성산읍 고성리에 있었다.
마을 한복판에는 1000년을 살았다는 느티나무와 600년정도 되었다는 팽나무가 당당하게 서 있다. 아마 이곳에 있는 느티나무는 도내에 있는 그리 많지 않은 느티나무중 가장 오래된 것이나 아닌가 싶다.
# 태풍으로 600년된 팽나무 쓰러져 한타깝게 소실
그런데 2011년 여름 태풍 무이파가 지나가면서 600년된 팽나무가 쓰러져버려 500여년간 현청소재지를 지키던 나무 한그루가 안타깝게 사라졌다.
마을 주민들은 봄에 느티나무에 싹이 트는 것을 보고 농사의 길흉을 점쳤다고 하는데 동쪽에서 먼저 잎이 나오면 동쪽지방, 서쪽부터 돋아나면 서쪽지방이 풍년이 찾아든다고 믿었다.
성읍리는 500여년 동안 현청의 소재지로서 역할을 했던 흔적들로 정의읍성과 일관헌, 정의향교가 있다.
정의읍성은 현청을 성읍리로 옮기던 세종 5년(1423년) 정월 9일에 시작해 13일만에 완공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성의 둘레는 2520척, 높이 13척이었으며 동서로 160m, 남북으로 140m쯤인 것으로 미뤄 축성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을지를 짐작케 한다.
동문․서문․남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성벽일부와 서문․남문만 복원되어 있을뿐으로 동문에는 주춧돌만 남아있다. 정의성내에는 객사, 동헌, 관아, 관청, 향소청, 산루, 산정, 사청, 비곡, 군기고, 어변청, 조련청, 현소 등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일헌관만 1975년 복원돼 있다.
일헌관은 현감이 집무를 보던 곳으로 영주산을 뒤로하여 남동향을 지어졌는데 1975년 옛 건물을 헐어내고 조선시대의 것을 고증하여 복원한 것인데 아쉬운 것은 시멘트 기둥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구조는 정면 3간, 측면 2간이며 2층 기단석 위에 축조되었다.
최근보면 각종 문화재나 절집 들이 콘크리트를 사용해 후다닥 건축하고 패인트 칠을 하여 나무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 것을 볼때면 우스꽝스럽다.
# 1975년 복원 일관헌 더덕더덕 시멘트기둥 '눈살'
건축학도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이를 풀어 쓸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목조건축에서 느길 수 있는 경쾌함을 시멘트를 발라서 나타낼 수는 없다.
이는 차라리 가만두는 것만 못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몇 년전 복제이라는 미명아래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한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탑을 보고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이렇게 생기가 없을 수가 있나 하는 것을 처음 느겼다.
사방으로 창호문을 시설하였고 퇴(退)는 개방했으며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측면은 현무암으로 마감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그 뒤편 서문 안쪽으로는 정의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제주목의 제주향교와 대정현 단산 자락밑에 위치한 대정향교와 더불어 도내에 설치됐던 3대 향교중 하나로 유림들이 모여 공부하던 학교이다.
정의향교는 태종 16년(1416) 오식 목사가 정의현청 소재지였던 성산읍 고성리에 성현(聖賢) 5위를 모시고 제향(祭享)을 지낼 수 있는 사당을 지은 것이 시초인데 그후 세종 2년(1420)동짓달에 향교를 설치했으며 세종 5년(1423) 정의현청 이설과 함께 정간 목사 재임시 성읍리 정의현성 서문 밖으로 이전했다.
영조14년(1738) 현감 나억령이 명륜당(明倫堂)과 재실(齋室)을 세웠으며 헌종15년(1849) 장인식 목사 때 현재 위치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때 강제 폐교되었다가, 1922년에 복교되었고, 1951년 길성운 도지사와 김선옥 군수 재임시 대성전을 중수했다.
지금의 정의향교는 1000여평의 면적에 경내에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수선당(首善堂), 수호사(守護舍) 등의 건물이 있다.
대부분의 향교가 남향으로 지어지는 것과는 달리 정의향교는 동향을 하고 있으며 대성전과 명륜당 구역이 직렬로 배치되지 않고 좌우로 나란히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영조 14년(1738)에 창건했다는 대성전은 평면 5간에 전후에 퇴(退)가 있으며 구조는 7량(樑)이고 기둥은 민흘림으로 직경 38cm로 굵은 편이다. 팔작지붕이며 곡선은 그간 여러 차례의 이건(移建)과 보수로 인하여 원형이 다소 변형되었다.
또한 역시 영조 14년 창건한 명륜당은 대정전과 같은 평면은 정면 5간이지만 전후좌우에 퇴가 있다. 전퇴(前退)는 앞으로 개방되어 사방(士房)으로 사용되고, 중앙 3간은 바닥이 마루로 되어 청방이며, 좌우익은 온돌방과 고방으로 쓰고 있다.
초석(礎石)은 원뿔대형이며 기둥은 민흘림으로 되었고 팔작지붕이다. 많은 보수로 용마루와 추녀 끝이 올라가면서 육지풍을 띤 건물로 변질되었다.
성읍리의 볼 곳은 어쩌면 이렇게 시멘트로 더덕더덕 바른 복원 건물이 아니라 제주민들이 살아온 민가들이다.
산업화 물결로 민가의 원형이 급속하게 파괴돼 오면서 변형된 민가마저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이곳이 초가들도 옛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고는 하나 민속문화재로 지정됨으로써 재산권 행사 등의 불편속에서도 그나마 원형질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이다.
제주가 고향인 해외동포들에게 고국선물로 향수를 자극하는 풍물이나 그림 또는 사진을 고르라면 이들은 눈덮인 초가집 모습을 두말없이 선택한다.
이는 제주의 민택(民宅)인 초가집이 거센 자연환경을 슬기롭게 극복해온 제주 선인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민택은 대단히 굳세게 보인다. 검푸른 바람벽에 둘러싸여 굵은 동아줄로 얽어맨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온 제주인의 삶과 지혜를 그대로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 진정한 볼거리는 시멘트 더덕더덕 붙은 관가가 아니라 소박한 민가
제주초가에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특징은 돌과 들판에 많이 나는 '새’를 재료로 사용한다. 돌로 벽을 쌓고 ‘새’로 지붕을 덮어 건물을 만드는데 건물의 규모는 경제적 형편과 가족상황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살림이 어렵거나 식구가 단촐한 경우에는 ‘안거리’라 불리는 1채만 지어서 살았으며 좀 여유가 있으면 안거리 맞은편에 ‘밖거리’를 지었다. 아들이 장성해 혼례를 치르면 부모는 아들 내외에게 안거리를 내주고 밖거리로 물러나거나 아들 내외를 밖거리에 기거하게 했다.
안·밖거리는 부엌이라고 하는 ‘정지’를 각각 갖추고 있었으며 더러는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목거리’를 두기도 했고 ‘굴묵’이라는 것을 두어 난방을 하는 곳과 취사를 하는 곳을 분리했다.
어느 집이든 정지 앞에는 ‘물구덕’을 얹어 놓는 받침대인‘물팡돌’이 있다. 개인 상수도가 없던 옛날에는 모든 집에서 마을 우물이나 샘터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했다.
물구덕은 물을 긷는 물허벅을 담은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로 제주의 여인들은 이것으로 물을 떠나 큰 항아리에 부어서 저장하고 썼다. 초가의 왼쪽으로 돌아가면 과거
이외에도 제주의 초가는 기후에 대처한 요구, 제주에만 있는 특이한 가족제도 등 문화의 특이성과 같은 그 형성배경으로 한반도 다른 지역의 민가와는 전혀 다른 유형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지역 민가의 경우 공간배치의 계급성으로 인해 합리성이나 기능성에 있어 전근대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등 독자적인 주(住)생활이 이뤄지지 않은 것과는 달리 제주의 주택은 계급성이 없고 남녀공간 구분이라는 전근대성도 사라졌다.
성읍마을의 민가는 남문에서부터 출발하여 남문 앞에 있는 고평오 가옥,
# 구렁팟 까마귀동산 돌탑
성읍2리 마을 진입로를 따라 100여m쯤 가면 동북쪽으로 난 좁은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세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또 세갈래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동북쪽에 방사탑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까마귀동산 돌탑(일명 방사탑)이라고 부른다.
높이 약 3m인 이 돌탑은 현무암 잡석을 이용하여 쌓았다. 쌓음 방식은 자유분방한 허튼층쌓기이며 쌓음돌 사이에 잔돌끼움을 하면서 원뿔형태를 취하고 있다.
탑 속은 크고작은 잡석을 이용하여 탑돌을 누르듯이 채우는 잡석채움을 하였다. 탑 위는 약간 올라가듯이 볼록한 모양인데 가운데는 높이 60cm쯤 되는 길쭉한 돌을 세워 놓았다. 이 긴 돌은 원뿔모양으로 올라가다가 자른듯이 처리된 돌탑의 둔함을 없애고 균형을 잡아 준다.
돌탑이 세워진 위치에서 동쪽은 ‘물골’이라는 하천 비슷한 골이 있어서 마을에서 가장 허(虛)하고 액이 들어 온다고 생각되는 지경이다.
그리고 마을의 동쪽에는 속칭 ‘도둑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 동산의 기(氣)가 마을에 들면 도둑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탑은 이를 보강하고 도둑기운을 막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는데 그래서인지 이 마을은 ‘도둑 없는 마을’로 지정되었다.
탑의 축조 시기는 정확히 알길은 없다. 다만 고려말∼조선초에 마을의 동쪽 지경인 ‘할미가름’에서 살던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설촌한후 오래지 않은 조선초·중기 경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이 탑은 쌓음 방식의 묘미인지 아직껏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는 탑을 보수했다거나 탑을 위해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아들 없는 집에서 탑 위에 돌을 세워 놓으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가끔 돌을 세워 놓았던 일도 있다고 하며 그렇게 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제주도의 돌탑에서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경우이다.
또한 이 마을에서는 탑이라 하지 않고 ‘까마귓동산’이라고 한다. 까마귀가 잘 앉는 나지막한 구릉인 동산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왜 동산으로 불려질까? 이것은 마을 사람들의 정신 세계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마을 서쪽에 있는 개오름 능선에서 보면 마을이 제비집형국이라 한다. 마치 제비집처럼 마을의 지세가 이루어졌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 제비집형국은 오목하여 여장남단(女長男短)의 명(命)을 이루어 여자는 오래 살고 남자는 귀하는데 까마귀동산 돌탑이 이를 막아준다고 믿는다.
이러한 돌탑인 방사탑은 도 전역에서 적잖이 분포하고 있으나 구렁팟 돌탑은 다른 마을의 탑처럼 짝을 이루거나 여러 개 중의 하나가 아니라 특이하게도 1기만 외롭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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