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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를 거쳐간 인물

북헌 김춘택

by 여랑 2011. 5. 12.

조선시대 역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치부한다면 당쟁의 역사로도 치부할 수 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은 이러한 당쟁으로 인해 생긴 말들이다. 당쟁은 국력을 소모하고 선비들에게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게도 했으며 당쟁 때문에 사약을 받아 죽거나 유배를 당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이러한 유배의 역사에서 제주는 그 중심에 있다. 충암 김정은 제주에서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사약을 받았으며, 송시열은 남인들의 요구에 왕명을 받고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제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고 추사 김정희도 제주에서 9년여간 유배생활을 했다.

이러한 제주 유배의 역사속에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 있다. 김춘택의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그는 1670년 2월 4일에 태어났다. 숙종의 장인이었던 김만기(金萬基)가 할아버지이고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작은 할아버지(從祖父)로 우리가 아는 <사씨남정기>를 지은 사람이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작은 할아버지 김만중과 아버지 김진구(金鎭龜)가 유배되고, 할아버지 김만기(金萬基)의 공신훈(功臣勳)이 삭적(削籍)되는 등 숙종의 외척(外戚)이자 노론(老論)의 명문 집안이었던 북헌의 집안은 큰 피해를 입었다.

# 30여년을 유배생활로 보내

김춘택이 유배 오기 전 제주에 온 것은 1689년, 당시 제주에 유배 와 있던 아버지 김진구를 공양하기 위해서 6년 동안 체류하였다.

그리고 1706년에 <세자모해>사건에 다시 연루돼 9월말 조천포에 도착하여 제주성 동문의 적거지에 머물렀다.

<세자모해사건>이란 1705년 왕이 눈병에 걸리면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말을 꺼내자, 당황한 대신들은 집단시위를 벌여 왕위 계승 문제를 중지시키면서 민심이 혼란해졌다.

이와관련 임부가 이듬 해 6월에 상소를 올렸는데, 1701년(숙종21) 인현왕후의 모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의 벗 윤순명의 공술에 "장희재가 대정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속에 김춘택이 장희재의 처와 간통을 하여 자신(희재)을 없앤 후 희빈 소생의 세자에게 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번져나간 사건이다.

이에 숙종은 분노하여 임부를 긴급체포하여 국문을 열었고, 1701년에 부안에 유배돼 있던 김춘택을 불렀다.

김춘택은 임부의 상소는 무고이며, 즉 "윤순명이 나를 죄에 연루시키기 위한 조작"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같은해 9월 제주에 이배(移配) 된다.

# 부친에 이어 자신도 제주에 유배

김춘택은 제주로 유배되자 십 수 년 전 부친 김진구가 유배시 거처하던 방에 먼저 위패를 모셨다.

부친이 죄인으로 적거하였고, 자신이 16년 후에 다시 죄인이 되어 적거하게 된 집의 위치를 <제주 동천 적거기(濟州東泉謫居記)>에 기록해 두었다.

김춘택의 적거지앞 가락쿳물이 있던 자리

"오직 제주 사람들만 머뭇거리며 유감으로 탄식하는 것이 언젠가는 잊혀질까 염려된다. 황량한 옛터를 가리키며 여기서 김씨 두 세대가 유배와 살던 곳이라고 하게 될 것이다…그 다음 세대에 관계있던 곳을 찾아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집을 역시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집은 동문 안 1리쯤에 있고, 가락쿳물이 그 앞을 지나고 있으므로 동천(東泉)이라고 한다. 창을 열면 한라산이 보이고, 서쪽 마당에는 밀감나무가 있고, 북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하고 집주인은 주기(州妓)인 오진(吳眞)이다."

그 후 산지(山池)에 있는 이윤의 집에 머물다가, 남문 청풍대(淸風臺) 근방으로 옮겨 유배를 살았다.
북헌은 산지 적거지 주인이었던 이윤이 죽자 아들 이중발의 부탁으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북헌은 제주에 유배 온지 몇 년 뒤 또다른 무고고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무죄로 밝혀져 적거지로 돌아왔고 다시 전라도 임피(臨陂)로 유배됐다가 1714년 다시 제주에 유배왔다가 1년 뒤에 풀려났다.

그때 당시 그의 시에 <대정을 지나며>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때의 적소가 대정이었고 그곳이 최후의 유배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오랜 유배생활에 많은 시문 남겨

김춘택은 일생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유배형을 받아 30여년을 유배생활로 보냈다. 유배지는 황해도 금천(金川)을 시작으로 부안(扶安), 해남, 제주목, 대정현이다.

제주에서의 유배 기간 동안 제주의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시문을 많이 남겨 오늘날 당시를 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기도 하다.

김춘택은 생전에 시간이 나는대로 자신의 시문을 스스로 편집해 놓을 정도로 문집을 남기려고 열의를 보였다.
1712년 임피에서 돌아온 뒤 자신의 문집을 정리해 두었고, 유배가 풀리고 작고 한 해 전인 1716년까지 자신의 글들을 모아두었다.

그의 저서는 목활자본으로 20권 7책의 <북헌집>이 있고, 따로 <만필(漫筆)> 1책이 있다.

<북헌집>은 그의 손자 두추(斗秋)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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