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주이야기/천리를 돌아왔던 유배의 땅7

북쪽을 향한 마음은 그리움이었을까, 증오였을까? 며칠전 봄바람이라 하기엔 다소 차갑게 느껴지게 불던 바람도 잠잠해지고 따스한 햇살이 세상을 끌어안고 하품하는 4월 어느 일요일, 우리는 다시 답사의 길을 잡기위해 약속장소로 발길을 세웠다. 지난밤의 술자리로 느긋하게 늦잠이라도 청하고 싶은 마음을 살포시 누르고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모든 회원들이 먼저나와 그동안 만나지못해 품어두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언제나 만나면 푸근해지고 편안해지는 사람들이다.모두들 모여 담배한대 태울 정도의 시간을 반가운 만남이야기로 정리하고 차에 올랐다. 우리들은 참 이상하면서도 묘했다. 만나면 그렇게 허물없고 다정한 사람들이지만 헤어져서 다음에 만날때까지의 기간에는 서로가 연락을 거의 하지않고 지낸다. 그래도 이심전심일까, 만나면 마음의 교감이 서로의 가슴에 앉아 있었다... 2013. 7. 19.
신천강씨 제주입도조 강영 조천에서 중산간도로로 가는 길 오름밧(봉소동) 바로 남쪽 길 옆에 '監司公墓域'이라는 표석이 있고 그 옆에 '진화문(進化門)'으로 들어가면 강영(康永)의 묘가 있다. 강영은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씨(신덕왕후)의 4촌 오빠로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의 난) 당시 전라감사로 있었다. 방원의 난으로 세자 방석과 방번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 일은 조선 태조 7년(서기 1398)의 일이고 그 외삼촌인 강영은 4년후인 태종 2년(서기 1402) 제주도로 귀양을 오게 된다. 강영은 함덕지경에서 제주고씨 소실을 맞아 정(禎)․복(福)․만(萬) 세 아들을 낳아 신천강씨 제주 입도조가 되는데 지금도 함덕에는 강영이 유배올 때 상륙한 곳이라 하여 강영개라 불리는 곳이 있다. 신천강씨 제주 입도조 강영의 묘역 하지만 재미 있는 .. 2011. 10. 19.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 조선의 역사에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같이 회자되는 선비도 드물다. 부패한 권력층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냥했다가 훈구파의 반격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음에 이른 사림파의 리더 조광조는 이상적인 자치 국가를 꿈꿨던 조선의 개혁 정치가였다. 기묘사화는 중종반정과 관련이 매우 깊다. 조선의 스물일곱 명의 임금 가운데 왕위에서 쫓겨나서 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복권이 안된 두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되면서 광기로 변한 연산군의 폭정은, 이를 참다못한 신하들에 의해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끝을 맺는다. 마침내 크고도 깊었던 연산군 폭정의 상처는 유교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대의명분으로 성리학을 중흥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때 신진사류의 대표적인.. 2011. 7. 2.
추사 김정희-잘 나가던 정객에서 유배객으로 차는 동광검문소를 지나 저항의 땅, 대정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정지역은 말그대로 저항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래서 볼만한 곳도 유적도 많다. 수많은 정객들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으며 일제의 아시아정복을 위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곳이다. 어디를 먼저 볼까 의논하다가 가까운 인성리에 있는 추사적거지부터 보기로 했다. 추사적거지는 동광검문소를 지나 서쪽으로 9㎞를 더 가다보면 인성리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오른쪽 대정읍성 동문사이로 난 마을길을 따라가면 바로 길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헌종 6년(1840) 윤상도 옥사가 재론되면서 그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 인성리에 유배된 인물이다. 윤상도는 1830년에 호조판서 박종훈 등을 탄핵하다가 군신(君臣)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죄로 추자도.. 2011. 4. 30.
유배의 인연-홍윤애와 조정철 서부관광도로를 따라가다 유수암 주유소에서 한라산쪽으로 가다보면 홍윤애의 무덤이 있다. 홍윤애의 무덤에는 하나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이는 홍윤애가 사모했던 조정철이 그녀가 죽고 30여년이 지난후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다. 조정철은 정조시대에 제주로 유배온 정객이었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격한 당쟁의 소용돌이로 인해 희생됐듯이 세손시절부터 위험한 고비를 여러번 넘겨 등극했다. 1777년 제주에 귀양온 조정철도 정조시해음모라는 죄목으로 위리안치됐다. 조정철은 이때 제주에서의 귀양살이를 시작으로 1788년 나주로 옮겨지고 1805년 풀려날때까지 무려 28년간의 유배생활을 이어간 인물이다. 더구나 조정철의 가문은 할아버지대부터 자신까지 3대에 걸.. 2011. 4. 30.
유배객들, 그들에게 제주는? 제주시내에는 광해군 말고도 걸죽한 유배인들의 적허지가 있다. 그중 귤림서원, 지금은 오현단에 모셔진 오현(五賢)중 처음으로 배향된 충암 김정은 제주읍성 동문 밖 금강사지(金剛寺址․지금의 동문시장 남쪽 남수교 인근)가 그의 적거지였다. 충암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중종 때에 조광조와 더불어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과 함께 탄핵당해 사약을 받을 누란지계의 위기에서 정광필의 노력으로 목숨을 건져 처음에는 금산(錦山)으로 유배됐다 뒤에 제주로 오게 되는 인물이다. 충암 김정은 중종 15년(1520) 8월에 제주목으로 유배당하는데 이듬해인 중종 16년(1521)에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사망한다. 그는 제주 유배 기간에 제주향교 교수 김양필, 유생 문세걸 등 제주 유생들과 교류하였고 제.. 2011.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