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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이야기 제주역사

주요 제주목사의 치적과 과실

by 여랑 2013. 11. 13.

 

주요 제주목사의 치적

 

오식(吳湜)

태종때 제주목사. 자는 위숙(渭叔), 호는 임계이며 본관은 울산이다.

재임당시 지역의 수조법(收組法)을 정하였고,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한데다 전세법(田稅法)도 없어 백성이 괴로우니 토지의 등급에 따라 시행토록 함.

1416년에는 한라산 남쪽 땅을 동서로 나누어 동쪽을 정의, 서쪽을 대정현을 둘 것을 건의해서 설치함.

 

최해산(崔海山)

세종때 제주목사. 고려말 화약를 발명한 최무선의 아들로 본관은 영주이다.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화약수련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화약병기를 비롯한 군장비 보강과 발전에 힘썼다. 1434년 부임하여 선정을 폈으나 관부(官簿)가 화재로 소실되자 그후 곧 정각(政閣)을 건립해 홍화각(弘化閣)이라고 편액하고, 우정당, 찬정당, 영고, 종루 등 200여칸을 새로 건축했다.

그리고 제주향교를 중건하고 예조참의 고득종으로 하여금 홍화각기를 짓게하고 편액을 쓰니 모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재임중에 교육, 농사, 마정, 군정 등 온갖 분야를 정비하고 확립시켜 명성높은 목민관으로 알려져 있다.

 

기건(奇虔)

세종때 제주목사. 해녀들이 전복을 따는 모습이 너무 애처롭게 느껴 목사로 부임해 있는 동안 전복을 먹지 않을 정도로 백성을 위했다고 전한다.

 

이약동(李約東)

성종때 제주목사. 자는 춘보(春甫 ), 호는 노촌(老村)이며 본관은 성주이다.

재직할 때 관아 아속들이 부정부패와 민폐를 단속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또한 한라산신묘를 건립, 이전에는 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거행하면서 동사자(凍死者)가 속출하는 등 많은 주민피해가 나자 1470년 삼의양봉 밑에 묘단을 개설하니 그로부터 산천단(山川檀)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임기가 끝나 떠날 때 의복, 마필, 제구(諸具) 등 관에서 얻은 것은 모두 관부에 저장하고 말 채찍까지도 관루에 걸어두고 떠나니 뒷날 도민들은 청백리라고 칭송했다 전한다.

 

이종윤(李從允)

성종때 제주목사. 일체의 선물금지와 공물 및 부역의 감소 등의 조치를 취하여 도민들이 칭송했고, 임기가 다해 교체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정에 재임용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 모두 4년4개월 동안 제주목사로 재임했다. 이는 고종때 부임했던 백낙연 목사와 함께 조선시대 최장수 재임기록이다.

 

이수동(李壽童)

중종때 제주목사. 자는 대수(大樹),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감귤재배를 장려하였고, 도내 5개 방호소에 과수원을 설치하여 군졸로 하여금 수호케 하였다. 성안에 구급용수가 없음을 알고 홍화각 남쪽에 우련당지(友蓮堂池)를 파서 물을 저장하고 연꽃을 길러 그 위에 우련당을 건립했다.

 

곽흘(郭屹)

명종때 제주목사.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 미비한 방호상태를 정비하고 성곽과 무기를 보수하면서 국방에 대비했다.

또 가락천이 성밖에 있어 주성이 포위되면 물공급이 어려울 것으로 보아 주성을 동쪽으로 넓혀 음료를 확보하였고, 과감한 억불숭유 정책을 폈다.

 

이경록(李慶祿)

선조때 제주목사로 본관은 전주이다.

중종때 장림목사가 쌓은 명월성을 다시 둘레 3,020척, 높이 8척으로 튼튼하게 개축했다.

1597년(선조 30) 부친상을 당하고서도 정유재란으로 귀향조차 못하고 방위에 전력을 쏟았다.

 

이원진(李元鎭)

효종때 제주목사. 본관은 여주이고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이며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외삼촌이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읍지인 탐라지를 편찬하고 제주의 독특한 환경과 풍물을 기록했다. 차귀진을 개설해 군사를 주둔시키고 대정향교를 지금의 단산 밑으로 이전했다.

 

이익태(李益泰)

숙종때 제주목사. 자는 대유(大裕)이고, 본관은 연안이다.

재임중에 지영록을 지었고 연무정을 중수했으며 송시열을 귤림서원에 배향하니 지금의 제주오현이 갖춰졌다.

 

이형상(李衡祥)

숙종때 제주목사.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본관은 전주이다.

1703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무속을 개혁하여 유속(儒俗)을 따르게 하였다. 고을나(高乙那), 양을나(梁乙那), 부을나(夫乙那)의 삼성(三性) 사당을 세우고 동성혼의 풍속을 금지했다.

신당 129개를 없앴으며 유고중 ‘남환박물’과 ‘탐라순력도’를 저술했다.

나중에 제주의 영혜사(永惠祠)와 귤림사(橘林祠)에 배향된다.

 

김정(金정)

영조때 제주목사. 자는 사달이며 호는 노봉(蘆峯), 본관은 안동이다.

학문을 일으키려고 1736년 삼천서당을 창건, 문화 교육진흥에 힘썼으며, 화북포가 비좁아 익사자가 자주 발생하자 군인을 동원해 방죽을 쌓아 수백보를 넓히고 높이도 6보나 높여 뱃길을 잘 통하게 했는데 목사가 직접 돌을 등으로 지어서 날랐다고 한다.

또한 우련당을 중건하고 소석대(小石坮)를 못 안에 축조, 화죽(花竹)을 심어 향의실이라 개명하고 향의실기(享儀室記)라는 명문을 지었는데 오늘날까지 전한다. 재임중 화북관에서 병사했다.

 

허명(許冥)

순조때 제주목사. 백성들에게 수세(水稅) 폐지를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이후부터 제주에는 공약(空約)이나 거짓약속을 하면 ‘허명(실제 발음은 허맹)의 문서로구나 하는 말이 생겨 지금까지 쓰인다고 전한다.

 

구재룡(具載龍)

헌종때 제주목사. 1840년 영국선박이 가파도에 와서 소와 말을 약탈하자 남은 소를 모동장(毛洞場)으로 방출하는 등 노력했으나 평소 경계를 소홀히 했다고 해서 파직됐다.

요역과 세금을 번거롭지 하지 않고 감면하는 등 선정을 펼쳐 비록 파직됐으나 백성들은 애석하게 생각하여 엄장면(嚴莊面면.지금의 애월읍)에 ‘사상구공재룡휼민선정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비(碑는) 지금 자연사박물관 구내에 있다.

 

이원조(李源祚)

헌종때 구재룡 후임의 제주목사. 자는 주현, 호은 응와,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1841년 화북포구에 있던 해신사(海神祠)를 중수하고, 본래 게액(揭額)이 없던 주성의 사당을 상현사(象賢祠)라고 이름지었다. 이 상현사는 1848년 장인식 목사때 영혜사(永惠祠)로 개명된다.

탐라지를 편저했는데, 이원진 목사가 200여년전 지은 탐라지를 ‘구탐라지’라고 하고, 이원조 목사가 지은 것을 ‘신탐라지’라고 한다.

응와는 명문장가로 탐라지를 비롯해 ‘효자 박계곤 행적기’, ‘한라산 유산가’, ‘연희각기’, ‘정온적려유허비문’, ‘홍화각중수기’, ‘삼천서당중수기’ 등을 남겼느데 동계 정온의 외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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