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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바람에 스치고 비에 젖어도

어느 몰락한 왕조의 무덤이기에...

by 여랑 2011. 10. 19.

왕자묘로 불리는 무덤군은 서귀포시 하원동, 방애오름 북쪽 '여가밭'이라는 작은 동산에 있는 분묘군(墳墓群)으로, 행정 지번(地番)으로는 서귀포시 하원동 산 21번지에 위치한다.

지리적으로는 법화사 앞에서 동쪽으로 900m 지점인 폭낭르에서 시멘트 포장된 농로를 따라 뜬내를 건너서 1500m 올라간 곳에서 동쪽을 보면 비닐하우스 있는 과수원이 있는데 그 과수원 북쪽 동산이다.

이 傳왕자묘에 대한 기록은 이원진의《耽羅誌草本》<대정현(大靜縣) 고적(古蹟)조>,《大靜郡邑誌》, 김석익(金錫翼)의《心齎集》,이응호(李膺鎬)의《탁라국서(?羅國書)》에 기록돼 있다. 이 기록들 모두 왕자묘를 현재의 하원동 산 21번지를 가리키고 있으며, 거리에 대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傳)해오는 왕자묘는 누구의 묘인가가 중요한데, 지금까지 이 묘가 누구의 묘인지 여러 사람이 주장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 설들은 김태능설, 김인호설, 강창화설(발굴조사 견해), 문기선 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김태능(金泰能)은 <元順帝避難宮址와 伯伯太子의 墓(1991)>라는 글에서, 백백태자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 설왕설래하는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는 그 근거로 "분묘 양측에 조면암으로 조각된 문관석상의 관복(冠服), 관대(冠帶), 손가락과 관복(冠服) 소매 주름 조각상태, 관모(官帽)의 조각이 제주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문관석상(文官石像) 관(冠)과는 그 모양이 다르다" 것이다. 즉 복식이나 조각 수법 면에서 흔히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조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인호(金仁顥)도 <濟州島 古墳에 대한 一見解(1995)>라는 글에서, "분묘 석인상의 돌이 제주에서 흔히 '먹돌'로 불리는 아주 딱딱하고 미끄닥한 냇돌이었고, 복식형태나 특히 홀(笏)의 크기, 그것을 잡은 손의 위치가 제주도 산소에서 보는 것과 크게 달라 특이한 감을 준다." 고 했다.

그는 말 무덤(馬塚)을 함께 조성한 점, 한국이나 제주도 양식이 아닌 특이한 무덤과 문인석 등을 들어 백백태자 묘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주장을 종합하면 명태조가 운남을 정벌하여 양왕(梁王)의 가족을 제주에 안치했는데 그들이 제주에서 살다가 죽자 묻힌 묘라는 것이다.
                                                              왕자묘 전경

몽골이 집권하던 윈난(雲南)은 1382년(홍무 15년) 주원장의 예하장수 전우덕(傳友德)에게 평정된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명나라 황제는 운남을 평정하고, 양왕과 그의 가족을 잡아서 1382년 7월, 제주도로 압송하여 안치케 하였다고 적고 있다.

명태조는 고려 우왕 8년(1382) 7월에 백백태자(伯伯太子)와 그 아들 육십노(六十奴)를 제주에 안치하고 우왕 14년(1388) 9월에는 명태조가 북벌할 때 귀순한 달달친왕(達達親王) 등 80여명을 제주에 안치하여 살게 하였다.

공양왕 4년(1392) 3월에는 양왕의 손자 애안첩목아(愛顔帖木兒) 등 4명을 제주에 안치하여 백백태자 등과 함께 살게 하였다.

# 탐라왕자묘 주장부터 몽골 백백태자의 묘 주장 등 이견 갈려

조선왕조실록에도 백백태자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태조 4년(1395) 5월8일 '백백태자에게 쌀과 콩 4백곡(斛)과 저마포(紵麻布․모시) 30필을, 양왕 손자에게는 쌀과 콩 백곡과 저마포 10장(匠)을 하사하였다'고 하며 정종 2년(1400) 9월16일에는 '제주의 백백태자가 환자(宦子)를 보내어 말 3필과 금가락지를 바쳤다'고 적고 있다.

또 태종 4년(1404) 10월4일에는 '백백태자가 제주에서 죽었다'고, 세종 26년(1444) 3월3일에는 병조에 전지하기를 '백백태자의 처가 연로한데 빈궁하여 살아가는 것이 불쌍하다. 제주로 하여금 매년 의복과 양식과 혜양지물(惠養之物․혜택을 베풀어 노약자를 잘 보살펴 기를 수 있는 품목의 물건)을 공급하여 특별히 존휼을 더하라. 또 사위 임울에게는 군역을 시키지 말고 오로지 봉양만을 맡도록 하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1호분 무덤

강창화는 《濟州 河源洞 墳墓群(2000)》에서, 분묘군이 최근 고씨 집안에서 관리해 온 점을 들며, 문충걸(文忠傑)의 사위가 고봉례(高鳳禮)라는 사실을 들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우고 있다.

# 분묘옆 석상은 도내 무덤 석상과 사뭇 달라

즉, "1601년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에 문충기(文忠基)가 연루됨으로써 집안이 몰락하자 외손에 의해 분묘가 관리된 것은 아닐까?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면, 이 분묘와 남평문씨와의 관련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3기 분묘의 주인공은 남평문씨 남제공파 왕자직 역임자인, 文昌祐, 文昌裕, 文公濟, 文臣輔, 文忠傑, 文忠甫, 文忠世, 文承瑞 중 어느 누구일 가능성이 있으며, 2대에 걸친 묘역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성주-왕자(星主-王子)는 탐라국시대(耽羅國時代 서기 476년~1005년)의 왕족을 나타내는 작위(爵位)로 성주는 탐라국왕(耽羅國王)을 말하는데 고후, 고청, 고계(高厚, 高淸, 高季) 등 3인이 신라로부터 처음 작위를 박아 세습하여 왔다.

조선 태종 2년(1402년)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는데 성주 고봉례는 좌도지관, 왕자 문충세는 우도지관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2호분 무덤

문기선은 <제주 최초의 석상 조성적 조명 연구보고(2003)>라는 글에서, "몽골인 복식 유풍이 남아 있고, 관두의(두루마기)를 입고 긴 방장대를 들고 있으며....북방형 발립(鉢笠)을 쓴 채 여막살이 하던 모습을 석상으로 조성....제주도 일반적인 석상과 크게 다른 것이 특징이다." 라고 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전해오는 유리원판 자료가 '가래천변 장군총 출토유물'이라고 명명돼 있어서, 이 무덤은 남평문씨 왕자들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기선의 주장은 강창화의 <조사보고서> 내용을 근거로 심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쨋든 하원동에 있는 왕자묘로 추정되는 분묘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일반적인 묘제 형태인 계단식 네모돌널무덤[] 3기()이며 판석과 활석으로 4~8단의 잘 다듬은 분묘이다.

1998년과 1999년 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이에 따르면 가장 남쪽에 있는 1호분과 가운데 있는 2호분은 조선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고려중기인 13세기에서 조선초기인 15세기 사이로 추정

1호분의 경우 곽의 구조와 각종 석물(비석·등잔대·문인석), 계단 시설, 축대 등으로 보아 당대의 고위층 무덤이며, 가장 영향력이 컸을 때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호분 무덤

북쪽에 있는 3호분에서는 고려 중기의 묘역에서 볼 수 있는 소옥()과 청동 그릇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출토 유물로 볼 때 제일 상단에 있는 3호분이 가장 먼저 축조되었고 이어 1호분, 2호분순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3기의 돌널무덤은 제주도에서 발견된 묘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분묘군일 뿐 아니라 제주에서는 흔치 않은 형태여서 제주 묘제 변천사 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높은 무덤이다.

다가가서 보니 다듬은 돌들이 많이 드러나 있고 봉분은 두 기가 모두 도굴 당하여 깊이 2m 정도로 파져 있다.(물론 현재는 잘 단장돼 있다)

십여년 전에는 멀리서도 뚜렷이 보일 정도였고 배롱나무도 있었다고 하는데 봉분 위에까지 잡목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다가 1998년 가을에 앞쪽의 무덤에는 잡목을 완전히 베어내자 봉분 모양이 드러났다고 한다

상석은 보이지 않으나 다듬은 돌로 제절을 만들어 설치하였고 봉분 앞이 상당히 넓은 것을 보면 단순한 전설만이 아니라 실제로 왕자의 무덤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직사각형 모양의 2평 정도 되는 무덤이 위아래로 나란히 둘이 있다. 직사각형의 무덤가에는 정교하게 돌을 다듬어 세웠으며 풍파에 파손되어 8cm 정도 남아 있다.

봉분의 크기는 둘 다 비슷한데 도굴된 밑을 보니 앞 봉분에는 숯을 넣었던 것으로 보이나 뒷 봉분에는 숯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렵도록 비슷한 무덤을 여러 개 만들었던 예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둘 중 하나는 헛무덤(虛墓)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무덤의 앞은 2m쯤 낮은데 그 곳에도 무덤이 있다. 상당히 오래된 무덤으로 봉분에는 잡목들이 자라고 있는데 무덤 주인이 타고 다니던 말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무 3년(1899) 읍지에 의하면 '대정현 동쪽 40리 지점(중문면) 궁산(弓山) 두 하천 사이에 왕자묘 3기가 있는데 지금도 섬돌이 남아 있는데 양쪽 구석에는 백작약이 심어져 있다.

가래촌(加來村․강정리)에는 궁궐 터가 있는데 초석들이 남아 있어서 아마도 탁라왕이 도읍하였던 곳이 아닌가 한다. 속설에 산방을 이도(二都)로 삼았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