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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바람에 스치고 비에 젖어도

천년세월 탐라왕국의 무덤

by 여랑 2011. 10. 19.

제주시 화북동 거로마을 능동산 성주묘(星主墓.추정)

제주시에서 동부산업도로로 들어가는 길목의 네거리를 곧 지나면 남쪽으로 황세왓, 북쪽으로 거로마을로 갈라지는 좁은 네거리가 있다.

여기서 거로쪽으로 들어가면 거로교(巨老橋)가 있고 다리에 붙어서 오른쪽으로 비탈진 농로가 있는데 비탈길을 내려가면 바로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왼쪽 길을 따라 100여m 가면 길이 끊기고 감귤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밭 안의 통로를 따라 100여m 되는 곳까지 가면 창고가 보이고 창고 북동쪽 동산에 성주묘로 추정되는 묘가 자리잡고 있다.

성주(星主)란 탐라왕국의 왕의 호칭이었다. 즉 성주묘는 탐라왕의 왕릉을 뜻하는 것으로 거로마을 능동산의 성주묘의 주인공은 고봉례(高鳳禮)와 그의 부인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알려지고 있다.

고봉례는 고려말 우왕때 살았던 마지막 성주인데 그는 자신의 성주 직을 반납한 비운의 주인공이다.

나중에 중앙에 진출해 세종때 한성판윤까지 오르는 고득종은 고봉례의 동생 고봉지의 아들로 고봉례의 입장에서는 조카가 된다.

 

서기 1402년 분에 넘치는 직위라 하여 반납한다고 했다. 고봉례는 목호토벌과 민란발생이 있었던 직후인 우왕 13년 4월에 성주인 부친 고실개(高實開.제주유배인에서는 고신걸(高臣傑)로 쓰여있어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를 따라 개경에 갔다가 「軍器少尹」으로 임명되었으며, 창왕 즉위년(서기1389) 9월에는 「濟州畜馬兼安撫別監」으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파견된 사실이 있다.

부친 고실개는 성주로서 당시 차현유가 난을 일으켜 안무사, 목사, 마축사 등을 살해하고 관사를 불태우고 우마를 宰食했을 때 진무 임엄.천호 고덕우.본토인 문신보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난을 소탕한 사람이다.

제주는 삼국시대처럼 먼 과거로 올라가서는 탐라, 탁라 등으로 불리웠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와서 지금의 제주목으로 정해지면서 오늘날의 제주라는 명칭이 일상화 됐다.

탐라는 삼국시대까지는 모든 면에서 한반도의 여러 체제들과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탐라국이 한반도 정치세력의 지방행정단위로의 편입시기는 대체로 지금으로부터 1000년전쯤인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각 시기별로 분수령이 되는 시기가 고려 헌종 2년(1011년)이고 다음이 숙종 10년(1105년), 그리고 의종(1146년~1170년)에 와서 탐라는 한반도 정치세력(고려)의 완전한 지방행정단위의 하나로 편입된다.

        성주묘로 추정되는 묘역의 예전모습. 언뜻 봐서는 묘역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관리가 안됐었다.

물론 헌종대 이전인 태조대 때에도 양 지역간의 교류는 있었다. 고려사에는 후삼국 통일이 이뤄진 2년만인 태조 8년에 탐라국의 성주와 왕자에게 작(爵)을 내려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각 지역의 지배세력을 통합해 가는 과정의 고려초기의 상황에 기록되고 있는 이러한 것이 어느 정도 상대적 자율성이 약화됐다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나 탐라의 경우 이때까지는 독립성이 훼손되지는 않은 시기이다.

하지만 전국적 규모로 수령이 파견되는 성종 14년(995년)년 이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는데 16년후인 헌종 2년(1011년)에 탐라에는 고려 조정이 내외관부에 지급하는 관인이었던 주기(朱記)를 사여받는다.

이는 탐라가 군현과 같은 예에 따라 주기를 내려줄 것을 간청했기에 이루어 졌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헌종 2년에 와서야 군현만이 지니는 주기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전까지는 고려의 군현단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탐라에 탐라군이라는 군현명이 정해진 것은 이로부터 94년이나 지난 숙종 10년(1105년)이다.

숙종 10년에 와서 탐라는 자율성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는 그래도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위치를 버리고 고려의 지방행정 단위인 탐라군으로 편입된다.

그리고 의종대에 와서는 중앙정부가 탐라에 수령을 처음으로 파견, 실실적인 중앙의 지배권이 미치기 시작하면서 탐라의 독립적인 역사는 뒤전으로 사라지고 완전한 한반도의 한 변방으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한반도의 지방행정단위로 편입됐다고는 하지만 조선 태종때까지는 형식적으로 나마 성주집안에 작을 수여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득종 부친 시대에 와서 그 형식적인 내용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묘의 구조는 가로 3m, 세로 4m 정도의 방묘(方墓)로, 2기가 90~95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남향을 하고 있다. 왼쪽 묘에는 두께 30cm, 가로 80~100cm, 높이 70~80cm 정도의 돌을 이용하여 벽을 세우고 그 속에 흙을 채웠었다.

판석석실형 고인돌을 연상케 하는 구조이다. 높이 70~80cm 중에서 30~40cm 정도는 땅 속으로 들어가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은 잘 다듬은 돌이 아니라 평평한 현무암 자연석을 사각형 모양의 직선이 되도록 일부 잘라내어 거친다듬한 것이다.

일부는 가로 세로 40~50cm의 작은 돌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4330년 5월 5일 답사 당시 보니 발굴작업을 하다가 멈춘 상태인데 무덤 속에는 숯을 묻었던 것이 남아 있다.

오른쪽 묘에는 왼쪽 묘와 같은 큰 돌들을 사용하지 않고 직경 30~40cm 정도의 자연석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취했다.

편평한 면을 바깥쪽으로 가게 하고 삐죽한 면을 안쪽으로 가게 해서 전체적으로는 편평한 면을 이루어 왼쪽의 묘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다. 이 무덤에서는 숯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묘를 성주묘라고 추정하는 단서로는 왕의 무덤인 능(陵마)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이 묘가 있는 곳을 '능동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고 고씨집안의 족보에 고봉례의 묘가 거로마을 능동산에 '남변임좌(南邊壬坐)되어 있다'고 돼 있는 고씨세보(高氏世譜)상의 고봉례의 묘 위치와 거의 일치한다.

또한 방묘(方墓)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된 묘제(墓制)인데 시기적으로 볼 때 고봉례의 생존 연대와 같으며 일반인의 무덤에 비해 축조 방식이 다르고 크다.


전체적으로 정교하게 이루어진 축조 방법은 물론 경사진 지형을 일정한 높이로 쌓고 시신은 방형의 곽을 만들어 깊게 묻은 축조 방식은 분묘조성시에 다수의 인력이 동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 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고봉례 성주의 사망년대와 비슷한데 출토된 상감청자
백사청자 등 10편의 출토유물들의 사용년대가 조선초기 이전인 점을 감안한다면 묘의 조성 시기가 늦어도 조선초기로 볼 수 있으며 이 또한 문헌이 전하는 고봉례 성주의 사망년대인 태종 11(서기 1411)과 일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