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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를 거쳐간 인물

백호 임제

by 여랑 2011. 4. 30.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紅顔)은 어디가고 백골(白骨)만 묻혔으니
잔 받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이 시는 백호 임제가 35세가 되던 해인 1583년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발령받아 가는 길에 송도(松都)에 이르러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을 찾아가 술상을 차려놓고 지은 시조이다.

이에 임제는 조정으로부터 '기생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비난을 받았는데 백호는 그만큼 자유분방한 생각을 가진 인물로 그에 대한 일화들은 한결같이 임제의 반봉건적 지향, 민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는 16세기 제주에 관한 기록을 남긴 남명소승(南溟小乘)》의 저자로 1577년 제주를 찾았던 인물이다.

임제는 1577년 29세에 알성시(謁聖試.임금이 문묘(文廟)에 참배할 때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급제하자, 바로 그 사실을 제주목사로 있는 부친 임진에게 알리기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 제주를 찾는다.

그는 1577년 11월 3일, 임금이 급제자에게 내려주는 어사화(御史花) 두 송이, 거문고 한 벌, 보검(寶劍) 한 자루로 행장을 꾸려 아버지가 기르던 말을 타고 고향을 출발하였다.

◀백호 임제의 서체

유유히 남쪽으로 내려오며, 술대접도 받고 거문고도 타면서 풍류를 즐기며 포구까지 왔다. 여러 날을 후풍(候風)하다 참지 못해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사나웠지만 배 띄우기를 고집하여 출항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11월 9일 저물어 조천관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제주 목사인 부친을 뵐 수 있었다.

《남명소승》은 임제가 문과에 급제하고, 1577년 11월 3일 고향을 떠나 부친을 뵈러 제주에 왔다가 쓴 기행문으로, 1578년 2월 그믐에 제주를 떠나는 배를 타고, 3월 3일 고향 집에 이르는 동안의 여정을 적은 것이다. 《남명소승》은 각종 제주 관련 기록이 풍부하여 16세기 제주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 강진에서 제주까지의 해로(海路), 호송선의 규모, 평생 군역에 시달리는 늙은 민중들의 모습, 남장(男裝)으로 말 타는 기생의 유풍(流風), 우도, 천지연, 한라산 등 여러 지역의 경승(景勝) 탐방, <제주김충암사신수문(濟州金沖菴祠新修文)>, <영랑곡(迎郞曲)>, <송랑곡(送郞曲)>, <열녀 김천덕의 기록>, <귤유보(橘柚譜>, 풍속 등의 기록이 흥미로우면서도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마다 제주 남자들이 배 침몰로 100여 명이나 죽기 때문에 남자가 귀하다는 슬픈 기록도 있다. 바로 <영랑곡>, <송랑곡>은 육지 원병을 기다리고 보내는 제주 여인들의 애달픈 사연을 노래한 것이다. 

《남명소승》의 가치는 기행문학의 백미로서 수려한 문장과 함께 그 속에 제주를 노래한 시편들이 많아 한국 고전 시문학을 연구할 때 귀중한 자료라는 데에 있다.

임제를 평가함에 있어서 이은상은, "조선 왕조 500년에 가장 뛰어난 천재시인"이자 "자주독립사상을 견지하여 사대부유(事大腐儒)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던 높은 인간성의 소유자" 라고 하였다.

또한 임제의 《남명소승》은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충암 김정의 <풍토기>를 보완하는 역사적인 자료이자, 16세기 제주인들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조선시대의 제주의 풍정(風情)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호의 마지막 벼슬은 36세 때에 예조정랑(禮曺正郞)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인데, 후에 벼슬을 버리고 전국의 명승 대천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일평생 호방하게 살면서 술과 기생을 벗하면서 거문고, 칼, 피리를 좋아하였다.

1587년 6월 4일 부친이 돌아가신 상중(喪中)인 같은 해 8월 11일, 39세를 일기로 고향 나주 회진에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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