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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시대는 어쩌다 이런 상처를 남기고

빗나간 야욕이 부른 시대의 상처

by 여랑 2011. 4. 28.

조금은 우울한 마음을 쓸어내리고 삼의사비에서 차를 돌려 동쪽으로 5분여 거리에 보성초등학교가 나오는데 그 정문에 묘비하나가 소슬하게 우리를 맞는다. 이름하여 '동계 정온 유허비'.

정온(1569~1642)은 광해군 때 제주에 유배되어 10년 동안 생활하다가 인조반정으로 유배가 풀려 떠난 사람으로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본관은 초계(草溪) 진사 惟明의 아들이다.

광해군 6년(1614) 부사직(副司直)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인륜에 어긋났음을 상소하고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을 참수하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해 8월 대정현 인성리에 유배된다. 유배생활 중에 「덕변록(德辨錄)」․「망북두시(望北斗詩)」․「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짓기도 했다.

 # 동계 정온 '스승을 버리고 소신을 택하다'

이 비는 1842년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정온의 적소였던 막은골에 세운 것으로 그 후 동문성 밖으로 옮겼다가 1963년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1977년 현위치로 이동되었다.

전면에는 '桐溪鄭先生遺墟碑'라 새겨져 있으며 비신의 높이는 120cm, 너비 61cm, 두께 18cm이다.

좌측면에는 '看役接生 姜瑞瑚 柳宗儉', 뒷면에는 '先生謫廬遺墟在大靜之東城夫知縣宗仁因其址闢書齋 居儒士夫土人爲政而知所先後可嘉也余 州首謁 先生于橘林祠修邑誌得 先生一律詩一跋文表而載之又命工竪石於其墟鳴呼先生德義名節與天地竝立齋之謫生能知愛護玆石於爲士也無愧余於 先生外裔也慕 先生公耳何敢私 崇禎後四壬寅星州李源祚 謹書' 우측면에는 '監董 前 同知 李仁觀 別監 金鼎洽'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사실 동계 정온은 광해군 시대 대북파의 영수인 정인홍의 제자였다. 그래서 그도 처음에는 스승을 따라 대북파에 속했으나 영창대군 문제로 알력이 생기면서 스스로 제자의 적을 없애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남인이 된다.

스승을 배신하는 것이야말로 당시 지식인의 최고 금기였던 상황에서 떠나야할 스승임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와 스승을 배신할 수 있었던 용기를 가졌던 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역사는 결국 정온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는 아무나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배신의 기준이 이익이 아니고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동계 정온은 귤림서원(지금의 오현단)에 모셔진 김정, 김상헌, 송시열, 송인수 등과 함께 제주 5현으로 배향돼 있다.

이제 우리는 유배와 항쟁의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대정현의 중심부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 유배와 저항의 반골기질 항일정신으로 이어져

19세기 도내에서 일어난 민란이 모두 이 지역에서 먼저 움직였던 것과 이 곳이 수많은 정객들의 유배지로 이용됐다는 것을 떠올리면 사회 불의와 맞서 싸우는 항쟁정신도 유배의 반골기질과 연결시켜 볼 수 있게 한다.

특히 대정지역의 고난의 역사는 근대까지도 이어져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강제노역과 각종 수탈,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희생까지 이어지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뚜렷하다.

우리는 그중 일제가 주민을 강제동원해 만든 비행장과 격납고 등의 군사시설의 흔적이 남아있는 알뜨르비행장으로 향한다. 알뜨르비행장은 대정읍 하모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보성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10여분만 차를 타고 가면 나온다.

송악산과 모슬포 사이의 알뜨르는 북쪽으로는 산방산․단산․모슬봉 등 여럿의 작은 오름들과 어우러지고 남쪽으로는 바다가 넘실대는 풍광 좋은 너른 들판이 있는 도내에선 몇안되는 평평하게 이어진 광활한 땅이다.

알뜨르는 '아래'를 뜻하는 '알'과 '들(野)'을 의미하는 '드르'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로 '아래 들'이라는 뜻인데 그러나 이 넓은 땅을 바라보는데는 군데군데 솟은 작은 둔덕같은 낯선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눈에 거슬린다. 밭에서 생산한 것을 저정하는 곳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 모두가 아픈 역사의 상처이다.

# 빚나간 야욕이 빚은 일제잔재의 흔적들

2차 세계대전이 중반을 넘으면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일제는 제주도를 본토 사수를 위한 방어기지로 이용하고자 병력 7만여명을 상주시키고 섬 전체를 요새화하기 위해 도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온갖 군사시설을 만들어 나간다.

그 가운데 큰 공사가 지금의 제주국제공항으로 사용되고 있는 정뜨르비행장이고 이곳 알뜨르비행장이다.

그러니까 바다쪽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이곳이 해방 이전 일본군이 본토 사수용으로 쓰려던 비행장인 것이다.

1926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해 확장 등을 거쳐 1940년께 개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알뜨르비행장에 일제는 주위에 20여개의 격납고를 설치했으며 인근 섯알오름에 고사포진지 등을 설치했다. 알뜨르비행장 주변에는 격납고와 정비창고, 포진지, 탄약창고 등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한 일본의 계획을 증거하는 많은 흔적들이 정뜨르․알뜨르비행장 외에도 오름마다에, 성산포에, 모슬포에 여럿 나타난다.

알뜨르비행장을 대촌(大村)비행장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본군이 주둔할 당시 오무라(大村)부대가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이곳에 오자마자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당시 비행기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항공기 격납고가 큰 아가리를 벌리고 그 위용을 보여주는데 있다.

50여년전에 만들어 놓은 일본의 잔재가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그 주변에 수십개가 돌아가며 있었다.

# 모슬포 대촌비행장은 댱시 주둔했던 오무라(大村)부대에서 유래

누구의 싯귀처럼 그 주변의 감자밭과 보리밭을 다 삼켜버릴 것 같다. 콘크리트로 지어서 그 위에는 잔디를 입히고 공중에서는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위장에 철저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일본의 잔재와 위세가 지금에도 그렇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느껴져 우울했다. 어쩌면 일제가 없었다면 우리 도민은 해방 후의 그 혼란과 희생을 감수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 넓디 넓은 땅에 비행장을 만들고 아시아 정복의 마지막 보루로 삼으려 했던 일본인들의 만용.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만용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패망했고 전쟁에 졌다.

그렇지만 일본은 다시 경제의 대국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곳에는 격납고 뿐만 아니라 참호들도 소나무 몇 그루 밑에 역시 잘 위장된 채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해방후 1947년 처음으로 육군 제9연대가 주둔했으며 6․25발발 이듬해인 1951년에는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되기도 했으며 중공군 포로수용소로도 이용됐었다.

우리는 알뜨르비행장을 뒤로하고 송악산으로 차를 돌린다.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해안길은 푸른바다 위에 조각처럼 떠 있는 형제섬을 끼고 돌아 송악산으로 연결된다.

송악산은 해발이 104m 밖에 안되는 뒷산같은 오름이지만 동․서․남 세면이 바다쪽으로 불거져나온 10~14m의 기암절벽으로 그 정상에서 태평양을 관망하는 경관은 시원함을 넘어 장쾌함을 준다.

동쪽으로는 우뚝 솟은 산방산과 단산, 그리고 사계리부터 서귀포까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해안선이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옛 대정현이 한눈에 조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