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서부관광도로를 힘차게 달리더니 동광검문소로 미끄러지고 있다. 헛묘는 지금의 동광리 검문소 6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창천으로 빠지는 길과 대정쪽으로 연결된 길 사이의 삼각지점에 있다. 헛묘를 찾아가 보니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백일홍만이 이곳에 묻히지도 못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 같다.
시신도 없어서 유품만 묻은 헛묘, 제주사람은 두 번 호사 하는데 그것이 혼인할 때 뭇사람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것이고 죽어서 꽃상여를 타고 가족과 친지들의 눈물속에 이승을 떠나는 것인데 그 호사도 못누렸으니 그 말못할 아픔에 코끝이 찡해 온다.
# 시신도 못찾아 혼만 묻은 헛묘......한번 호사도 못하고
따뜻한 정남향을 향해 묘를 쓴 마음이 저승에서나마 따뜻한 삶을 살아보라는 것같아 가슴이 아려온다. 4.3이 터지고 그 해 11월부터 중산간마을 소개령과 함께 끔찍한 대대적인 학살이 진행되면서 유격대와 가까운 산간마을은 산사람이라는 이유하나로 무자비하게 학살을 당했다.
조금의 의심만 가면 죽은 목숨이었다. 그때는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고 한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것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무등이왓 사람들은 소개해서 내려가지도 못하고 산으로 오르지도 못해서 있다가 옆에 있는 큰넓게라는 동굴로 피신하고 그곳도 토벌대에게 발각되자 다시 볼래오름으로 피신하게 된다.
큰넓궤 입구
볼래오름은 한라산 영실 근처에 있는 오름으로 큰넓게에서 15㎞정도 떨어져 있는 오름이다.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모두 잡힌 것이다.
그때 잡힌 사람들이 정방폭포서 처형을 당했는데 그때가 무자년 섣달 스무나흘날. 당시의 분위기로 시체를 찾으러 갈 수가 없어 1년 뒤에 찾아가보니 시체가 다 썩어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가 없었단다.
심지어 찾지 못한 시신들도 많고, 그 때 시신들을 찾지 못한 가족들은 나중에 칠성판을 만들고 옷을 지어다가 무당을 불러 놓고 정방폭포에서 혼만 불러다가 장례를 치르고 이곳에 묻었단다. 그렇게 해서 시신이 없는 무덤인 헛묘가 생겨난 것이다.
#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 '백조일손지묘'
대정읍 중심가를 관통하여 남쪽으로 송악산이 보이고 동북쪽으로는 산방산이 우뚝 서있는 '사계리 공동묘지'한 켠에 1백32구가 안장되어 있는 백조일손지묘는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라는 의미이다.
1948년에 일어난 4.3항쟁이 다음해에는 군경이 대토벌로 어느 정도 와해되자 정부는 선무공작으로 귀순을 유도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귀순자로 내려오게 되는데 그들은 엄격한 심사를 받고 6.25가 발발할 때까지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지만 6.25가 발발하자 예비검속으로 체포되고 이곳에 묻힌 사람들처럼 희생되게 된 것이다.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은 송악산 서편에 위치한 '섯알오름의 탄약고터'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섯알오름의 탄약고는 일제가 패망하고 나자 폭파시켜 큰 웅덩이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6.25가 발발하자 전에 산에서 귀순한 자들이 또다시 산사람이 되던지 부역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칠월칠석날 새벽 무참히 학살을 자행한다.
6.25만 없었어도 이분들의 희생은 없었을 것을…. 갖고 온 소주병을 따고 과일을 꺼내 간소히 제를 지낸 후 묘에 뿌렸다. 살아서 한 맺힌 사람들 죽어서나마 편안히 가라고 꽃잎도 한 장 띄어 주었다. 모두가 말이 없다. 분위기도 무거워진다. 저기 멀리 보이는 한라산이 무슨 말인가 하는듯 하다.
# 장렬히 산화했다(?)는 초토화작전의 책임자 박진경
천왕사 입구에 있는 제주시 충혼묘지 진입로를 다 들어가면 입구 오른쪽에 4.3 발발이후 진압책임자로 부임했던 박진경 대령의 추도비가 서 있다.
전면에 '故陸軍大領密陽朴公珍景追悼碑'라 써 있고 후면에는 '조상에 관한 내용과…… 불행히도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글이 있을 뿐 암살당하였다는 말은 없다.
제주충혼묘지 입구에 서 있는 박진경 추모비
처음 세운 것은 1952년 11월7일이었으나 비명이 마모되어 원래의 비는 묻고 새로 비석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며 다시 세운 때는 1985년 6월이다.
비석을 세운 사람은'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일동(濟州道民及軍警援護會一同)'으로 적고 있는데 과연 누가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이 비석을 세우는 데 동의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박진경 대령은 김익렬 연대장 후임으로 1948년 5월 6일 9연대장(나중에 11연대로 재편성됨)으로 부임
하여 '무차별 체포작전'을 펴다 1948년 6월18일 새벽 3시15분께 잠자다 살해된다.
# 평화해결 주장했던 김익렬 뒤 이은 일제말기 제주 주둔했던 일본군 소위
박진경 연대장은 일제 때 오사카 외국어학교를 나와 영어에 능통해 미군과 잘 통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일제 말기 일본군(소위)으로 제주도에 주둔한 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 출신인 그의 취임사는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였다. 그리고 그는 딘 장군의 명을 받아 강경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박대령을 암살한 인물은 모슬포 9연대 창설요원으로 소대장을 거쳐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문상길 중위(당시 23세)와 손선호 하사관 등이었다.문상길은 군법회의에서 범행동기에 대해 "우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다른 정치적 목적도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군인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박대령이 민족반역자라는 근거는 '도가 지나친 강경진압'이었다. 손선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도를 넘은 강경진압..... 부하에 암살당해
"우리가 화북이라는 부락에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본 박대령은 무조건하고 그 아이를 쏘아 넘어뜨렸다. 그 밖에 부하들과 사격 연습을 한다고 소나 돼지를 함부로 쏘아 넘어뜨리고 폭도가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그곳까지 데리고 가서 만약에 폭도가 없으면 그 자리에서 총살하여 버렸다"
검찰관 이지형 중령은 '그릇된 민족 지상의 이념에서 군대의 생명인 규율을 문란케 한 중범죄'라고 규정하고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정부수립 하루전인 8월14일 고등군법회의 선고 공판에서 문상길 중위,손선호 하사관,신상우 하사관,배경용 하사관 등 4명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판결이 사회에 알려지자 사형은 부당하다는 여론이 돌았다. 법학가동맹은 '제주도민 30만을 위해서나 또는 민족적 정기에서 보더라도 가해자 손선호 등 4명에 대하여 총살형에 처한다는 것은 범행 동기를 전혀 무시한 것으로 용납할 수 없음을 법학도의 입장에서 강경히 주장한다.(조선일보 48년 8월27일자)'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여론에도 불구하고 딘 장군은 총살형의 집행을 인준하는 서명을 했고 사형선고가 내려진후 40일후인 9월23일 오후2시 경기도 수색산록에서 집행되었다.
박진경이 부임하여 온후 진행된 4.3에 대한 무차별 강경진압에 대해 군정장관 딘 장군은 '성공적인 작전'으로 간주, 부임 한 달도 안 되어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시켰으며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박중령의 대령 진급시 직접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고 한다. 박진경 대령의 고향인 경남 남해군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는데 그곳의 비문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북괴는 제주도를 공산기지화 설정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을 봉기 양민학살폭동을 감행하자 딘 소장은 공(公, 박진경)을 11연대장으로 보임하였다. 제주도민의 생명보호와 사태수습명을 받은 공(公)은 불과 2개월내 소위 공산반란 해방군 주력을 섬멸한 전공에 감탄한 딘 소장은 대령으로 승진시켰다. 그 후 산발적 폭동공비잔당 소탕 작전 중 불행히도 적의 흉탄에 장렬히 산화하셨다’
# 그의 고향인 남해군 동상앞 돌하르방은 왜 세워졌는지?
그런데 그의 동상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는 현무암의 돌하르방 2기가 세워져 있다.
경남 남해군민 공원에 세워진 박진경 동상.
한편 미군 제24군단 정보보고서와 당시 서울신문 보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1948년 6월18일 새벽 3시15분께 잠자다 살해되었다. 박대령은 조선에서 가장 탁월한 부대장이자 전투지휘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던 인물이다'
'공보부 발표에 따르면 조선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은 1948년 6월18일 오전 3시15분 제주연대본부 숙사에서 취침중 암살되었다는데, 아직 범인은 판명되지 않았다. 이에 딘 군정장관은 사건을 직접 조사하기 위하여 경찰의 총포연구 권위자 2명을 대동하고 18일 정오 항공편으로 제주 현지로 향하였다'
박진경 대령의 암살은 제주도를 죽음의 공포로 내몰았다. 미군정은 후임 연대장으로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을 임명한다.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박진경 연대장 고별식. 딘 군정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은 모두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다. 만주 지역에서 중국군이나 항일 빨치산과 싸웠던 전투 경력을 미군정이 인정해 제주 진압전을 맡긴 것이다.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된 이후 박진경 대령을 시작으로 4·3 진압을 책임진 4명의 연대장은 놀랍게도 일본군 출신으로 채워졌다.
# 박진경 암살후 줄줄이 일본군 출신이 연대장으로 4.3토벌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중 대다수가 일본군 출신인 이들이 연대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절에 발생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부가 2003년 제주4·3을 공권력에 의해 민간인학살 사건으로 규정하고, 또 이에 근거해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과 제주도민, 4·3유족에게 사과한 지금, 평화협상을 벌이며 자국민을 초토화하라는 미군정의 명령을 거부한 ‘평화주의자’ 김익렬 연대장의 추모비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무장대 최후의 주둔지 이덕구 산전
제1횡단도로를 타고 제주시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수장교에서 동남동쪽으로 직선거리 2Km쯤 되는 곳, 또는 5.16도로에서 교래리를 향하여 3Km쯤 가다가 시멘트 포장된 길을 따라 다시 2Km쯤에서 대략 남쪽으로 1.5Km쯤 되는 곳이 바로 4.3 때 최후의 인민유격대가 주둔했던 곳이며 유격대장 이덕구가 사살됐다고 하는 이덕구산전이다.
이 곳은 괴평이오름의 북쪽 등성이에 해당하며, Y자형의 '안새왓내'와 '밧새왓내'가 합수되는 위쪽의 밋밋한 분지이다. 북쪽에는 지그리오름, 남쪽에는 거문오름이 있다.
산중에 있는 넓은 분지에다 주변에 물이 좋고 뒷편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어 중산간 마을을 비롯해 조천 일대의 마을을 관망할 수 있으며, 계곡은 천연적인 성 역할을 하고 있어 토벌대가 찾기도 힘들지만 찾아도 쉽게 공격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금은 숲이 울창해졌지만 4.3 당시에는 나무가 없는 평지였다. 유격대가 살았던 아지트의 흔적과 그 당시 생활도구로 쓰였던 솥, 사기그릇, 질그릇 등이 깨어진 채로 남아 있고,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비석을 살펴보면 총알 맞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인공 연못도 조그맣게 남아 있는데 주변에 얼마든지 쓰고도 남을 만큼의 맑은 계곡물이 있음에도 못을 만든 까닭은 계곡에서 쌀을 씻으면 하류에서 토벌대가 쌀뜨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즉,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계곡의 물을 인공 못에 길어다 놓고 생활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 전략적 지형요새......49년6월 이덕구 여기서 마지막 전투
이덕구는 조천읍 신촌리 출신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재학중 학병으로 입대 관동군 장교로 종전을 맞아 귀향한 후 1946년 3월에 개원한 조천중학원(1948년 4월 폐교.조천지서 건너편 일제시대의 경방단 사무실을 학교로 씀, 국어 현유복, 영어 김동환, 수학 물리 김민학, 역사.사회.체육 이덕구)에서 1947년 3월 총파업 이전까지 역사와 체육 교사로 재직하다가 3.1 사건에 관련, 조천중학원 파업 문제에 대한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왼쪽 고막이 터졌다고 하며 한 달 이상 경찰에 구금되어 있었다.
풀려난 뒤 다시 교단에 얼마 동안 섰다가 학생들에게 '마지막 수업이다. 육지로 간다'는 인사를 한 뒤 장기휴가원을 내고 교단을 떠났으며, 47년 8.15 검거 선풍 후 잠적하였는데 1948년 1월22일과 26일 사이에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 221명이 검거되는데 여기에 이덕구도 끼어 있었다.
며칠 후 63명은 방면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덕구의 방면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어 불확실하다. 4.3이 발발하면서 입산한 것으로 보이는데 1948년 4월15일 남로당 제주도당부대회에서 4.3봉기를 추인하고 인민유격대를 조직할 때 제1연대장을 맡은 것으로 보아 강경파 핵심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4월16일에는 인민유격대 총책 김달삼(본명 이승진)의 명의로 '5.10 망국단선 반대를 위한 무장 봉기 성명'을 발표하여 무장 투쟁을 공식화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참가한 김달삼이 제주로 돌아오지 않게 되자 2대 유격대장으로 군사부 총책임자가 된다.
뛰어난 지도력으로 항쟁을 지휘하지만 토벌대의 대규모화 등으로 항쟁이 약화된 무렵인 1949년 6월7일 화북지서에서 출동한 토벌대에 포위되어 격전 끝에 자살(또는 사살, 불확실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덕구의 은신처를 알아서 길 안내를 한 사람은 유격대에 있다가 내려와 자수한 사람으로 용강동 출신 고모씨로 알려지고 있다.
# 시대는 평범했던 한 사람을 신화로 만들고
이덕구는 민중들 사이에 신화적인 존재로 새겨져 있어 그에 대한 일화들이 많다.
예를 들면, 그가 얼마나 날쌘지 경찰이 그를 발견하여 총을 겨누다 보면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없어져 버리고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모래만 수북이 남아 있더라는 것이며, 평소에 다리에 모래 주머니를 차고 다니다가 위급한 상황이 되면 풀고 달아나니까 얼마나 빠르겠느냐는 것, '덕구 덕구 이덕구 박박 얽은 이덕구'하는 노래가 전해지는 것 등이다.
이덕구의 시신은 관덕정 앞 당시 경찰서 정문에 가슴 호주머니에 숟가락을 꽂은 채 십자가에 묶인 모양으로 며칠 동안 전시되었었다. 이런 모습을 찍은 사진이 일본 신문에 게재되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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