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의 최대의 비극이라면 한국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강대국의 이익다툼과 이데올로기의 이념적 내부대립으로 인해 동족의 가슴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48년 4월3일을 기해 본격적으로 분출된 제주 4.3은 그러한 한국전쟁이 어떻게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가를 대변해주는 해방정국의 민족모순을 집약적으로 극명하게 표출시킨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4.3의 원인과 배경을 차치하고 가장 신성시돼야할 인권이 무자비하게 유린됐다는데 있다.
# 해방정국의 민족모순 극명하게 표출
얼추잡아도 2만여명에 이르는 제주도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4.3은 당시 도내 인구가 27만여명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피해자가 10명중 1명꼴이라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이는 4.3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지 않는 가족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4.3으로 인한 피해자중 90% 이상이 토벌대에 의해 무참하게 이유도 없이 학살됐다는 것이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해방의 환희는 한반도 구석구석에 넘쳤고 제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새 나라를 세운다는 기쁨속에 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돼 치안과 행정의 공백을 메워나간다.
초기에 미군정은 제주도인민위원회와 협력관계를 이어가지만 곧 대립과 갈등을 빗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1947년 3월1일 관덕정 앞에서의 3.1절 기념집회에서 집회군중에게 무차별 발포를 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가 생겼고 도민들은 항의표시로 직장과 학교를 중심으로 총파업에 나서는데 미군정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4.3의 도화선이 된다.
# 해방-분단-전쟁으로 이어지는 숨가뿐 해방정국의 축소판
미군정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육지에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을 투입하고 이들은 도민들에게 갖은 테러를 자행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분노하던 민심을 크게 자극시킨다.
4.3발발때까지 1년간 도민 2500여명이 구금되고 4.3이 일어나기 한달전인 3월에는 경찰에 의한 고문치사 사건까지 발생해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가는 와중에 '5.10 남한단독선거'가 결정되기에 이른다.
1948년 4월3일 밤, 한라산 오름마다 피어 오른 봉화를 신호로 500여명의 무장대가 11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간부의 집을 습격하면서 무장봉기의 서막이 오른다.
무장대는 단독선거 반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추방을 요구조건으로 내건다. 미군정은 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는 한편 추가로 1700명의 경찰을 제주에 내려보내고 서북청년단원 500명을 증파한다.
이렇게 강경대응으로 일관된 토벌작전이 진행되자 주민들은 화를 피하기위해 산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은 대부분 토벌대에게 붙잡혀 사살되고 남아있던 가족들도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집단학살되다.
미군정은 4월17일 국방경비대인 모슬포주둔 제9연대(연대장 김익렬)를 진압작전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면서 사건은 치안상황을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다. 또한 미군정은 부산주둔 5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 제주에 파병하도록 조치한다.
그러나 진압작전에 참여한 9연대장 김익렬은 이 사태가 도민들과 경찰 및 극우청년단체간의 충돌로 인식, '선선무(先宣撫) 후토벌(後討伐)'원칙을 세우고 무장대와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한다.
# 유일한 희망이었던 4.28회담 오라리 사건으로 원점회귀...초토화작전 시동
그 결과 4월28일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군사총책 김달삼이 대정읍 구억분교에서 회동해 평화회담을 성사시키고 전투중지와 신변안전보장 등을 합의하기에 이르지만 3일후인 5월1일 경찰과 우익청년단에 의한 고의적으로 평화협정을 방해하는 오라리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태는 원점을 돌아간다.
5월5일 군정장관 딘 소장은 평화적 해결방안을 건의하다 조병옥 경무부장과 충돌한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하고 박진경 대령을 후임으로 임명한다. 더욱기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가 추가로 파견되면서 토벌작전은 더욱 강화되는 것과 맞물려 5.10선거에서 도내 3개 선거구중 2개 선거구가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면서 제주는 유일하게 선거 거부지역으로 남는다.
4.28 평화회담을 방해하는 경찰의 오라리 사건
5·5 최고수뇌부회의 참석차 제주에 온 관계자들. 좌측에서 두번째 군정장관 딘 소장,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병옥 경무부장, 맨 오른쪽이 김익렬 연대장.
5.10선거가 저지되면서 수도경찰청 형사대를 주축으로 제주에 특별수사대가 추가로 설치되고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파견해 경비대, 해안경비대, 경찰과 미군을 직접 통솔한다.
김익렬 대령 후임으로 온 박진경 대령은 대대적인 토벌위주의 작전을 전개하는데 5월21일에는 하사관 11명을 포함한 41명의 부대원들이 무기고를 털고 탈영, 무장대에 가담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한달여 후인 6월18일 박진경 연대장은 숙소에서 부하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군정은 11연대를 수원으로 복귀시키는 한편 대구 주둔 6연대 1개 대대와 본래의 병력으로 9연대를 재편성, 송요찬 소령을 연대장으로 임명하고 토벌임무에 나선다.
여름을 넘기고 제주경비대총사령부는 토벌병력을 늘리기 위해 여수에 있는 제14연대의 1개 대대를 추가 파병해주도록 요청하는데 10월19일 여순반란사건이 터짐으로써 제주는 물론 전국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 여순반란사건으로 전국 소용돌이......참혹한 양민학살로 이어져
여순사건이 발생하면서 전국적으로 군내부에 대대적인 숙군작업이 진행됐으며 제주에도 참혹한 양민학살을 몰고 온다.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에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인정,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중산간 마을에 대해 소개령을 내린다.
초토화작전은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본격화되는데 토벌군은 무장대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차단한다는 이유로 100여개 중산간 마을 민가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한다.
이때 중산간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발행하는데 하루에 100명 이상이 사살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서북청년단의 테러는 그 악명을 떨쳤는데 부녀자 겁탈은 보통이고 애를 가진 임산부를 죽이고 며느리와 시아버지를 모두 벗겨 수치심을 자극하는 등 갖가기 만행을 저질렀다.
군․경의 초토화 작전으로 더욱 쫓기게 된 무장대들도 그들의 아지트를 산중 깊숙이 옮기는 한편 때때로 해변마을을 급습해 보복기습전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남원면 남원, 구좌면 세화리 등을 습격해 우익인사를 사살한다.
# 서북청년단 악명떨친 만행에 도민들 분노
9연대는 그해 12월 함병선이 사령관으로 있던 2연대와 교체되고 이듬해인 1949년 3월에는 제주지역 사태를 조속히 종식시키기 위해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홍 대령)를 설치한다.
겨울을 넘기면서 무장대의 수는 250여명으로 줄어들었고 전투사령부의 토벌작전으로 4월 중순이후에는 무장대의 규모가 현저히 감소해 전투자체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해 5월15일 제주도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4.3은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1년여뒤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그 여파는 다시 제주까지 미쳤다.
전선이 남쪽으로 크게 밀리면서 4.3연루자 가운데 이미 훈방됐거나 석방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예비검속이 실시된다.
이들은 현재 제주국제공항이 있는 자리나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등지에서 집단 처형되고 수장당한 주민도 적지 않았다. 육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4.3 연루자 가운데 즉결처분된 사람들도 많다.
# 예비검속으로 또한번의 비극맞아
1953년 1월 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가 한라산 작전지역에 투입되는데 5개월 동안 모두 일곱차례에 걸쳐 토벌작전을 벌여 무장대 잔당들을 거의 소멸한다.
1954년 9월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이 한라산 금족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하면서 4.3은 사건발생 6년6개월만에 그 종말을 고한다.
하지만 4.3은 그렇게 외형상 막을 내리지만 도민들의 가슴에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음은 물론 반세기를 넘긴 지금에도 4.3으로 인한 아픈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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