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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믿기는 뭘 믿었단 말이냐

삼의사여 믿기는 뭘 믿었단 말이냐?

by 여랑 2011. 4. 30.

추사적거지를 나오면 동문터 밖에 길가 옆 귀퉁이에 언뜻 봐선 초라하게 버려진듯한 비석 하나가 지나가는 답사팀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름하여 '삼의사비'이다.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생겨나는 폐단에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는 글로 시작하는 이 비는 '이재수의 난'으로 불리는 1901년 신축년농민항쟁을 이끈 세 장두를 기리는 비석이다.

# 100여년전 제주역사 증언하며 서 있는 비석

그 옆의 추사 김정희선생 기념관이 정갈하고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가냘프게 1백여년전의 사건을 증언하며 서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김정희 선생이야 중앙의 정객으로서 제주에 귀향와 인성리에 머물면서 제주에 서예와 학문을 전수해 제주사회에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해서 지금은 그렇게 커다란 기념관까지 짓고 가고 오는 이의 발길을 붙잡지만 그곳에서 불과 50여m도 안떨어진 곳에 서있는'삼의사비'의 묘비는 제주사회의 장두정신의 표본이자 제주민중의 골깊고 고뇌서린 역사의 풍랑을 헤쳐온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모습이다.

# 지역사회 장두정신의 표본이 추사적거지 보다도 보잘것 없어

오히려 추사의 기념관의 모습과 '삼의사비'의 모습은 제주에 살고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바꾸어져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우리는 너무나도 초라하게 보이는 그 비석의 옆과 뒤쪽에 깨알만큼 잔잔하게 새겨져 있는 1백여년 전의 역사의 증인을 마음속으로 다시 되뇌이며 읽어보았다.

그러니까 19세기 후반, 어디 제주만 그랬으랴만은 그때 당시 조선은 성리학을 주축으로한 양반사회가 더 이상 사회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갔고 영․정도 시대를 지나 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전정․군정․환곡 등으로 대표되는 과세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

민중은 점차로 양반중심의 봉건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일정 정도의 성숙한 의식을 각성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적인 개회의 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강화도 조약후 서양 열강의 침투는 조선의 모든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동양에의 침투는 우선 종교를 가지고 시작된다.

# 힘없는 나라의 고달픈 백성의 역사 

천주교가 이 땅에 끼친 긍정적 영향을 무시할 순 없지만 일단 국가적으로는 '우선 종교의 교리를 설교하라. 그렇게 해서 거부감을 없앤 다음 상품을 팔아라'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시 천주교는 제주도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수교하면서 포교를 허용받아 외세를 등에 업고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면서 그의 원조와 보호를 바라는 사람들을 신도로 집중적으로 받아 들였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천주교 세력은 일반 농민들은 물론 관청과도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 제주에는 광무개혁 이후 수탈을 가중시키기 위해 조세 징수 담당관리로 봉세관 강봉헌이 파견되어 있었다. 그는 제주도에 조세 징수가 가능한 자원을 모두 찾아내고 기존 자원을 전면적으로 재평가하여 장부를 작성하면서 가혹한 수탈에 나서고 있었다.

강봉헌은 수백년 동안 조세징수 실무를 맡아보던 향리층을 제치고 선교사들의 비호를 받으며 기세를 올리고 있던 천주교와 손을 잡게 된다. 천주교도들은 봉세관과 결탁하여 중간 수탈자로 등장하였다.

특히 교세를 확장하면서 그들은 지방토속신앙과 많은 갈등을 빗었는데 이는 최근 발견된 '수신영약(修身靈藥․1900)'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46쪽의 이 책은 '이재수의 난(辛丑敎案․1901)'이 일어날 정도로 토착민들과의 갈등이 가장 컸던 제주도에 1899년 부임, 도내에 처음 본당을 세운 한국인 김원영 신부가 저술한 46장의 국한문 혼용체 필사본이다.

이 책에는 26항에 걸쳐 천주교에 대한 일반적 소개와 함께 제주도 토착신앙과 혼인풍습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다.

제주도의 토착신앙인 뱀숭배, 정월 거리제, 산신제사인 명감, 절터의 굿, 용신제(龍神祭), 칠성제, 영등굿, 뚝할망 숭배 등 모두 23가지의 토착풍습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특히 당시 유명한 무당이었던 '삼성할망'을 찾아가 '요사를 부린다'며 굿을 비난한 내용은 토착신앙에 대한 공격적 혐오를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비슷한 형태로 일어났다. 지방관과 선교사, 지방통치기구와 교회,일반 민중과 천주교도 사이에서 발생한 사안은 전국에서 수없이 많았다.

강우백,오대현,이재수 등은 전도에 격문을 띄우고 동․서 양군과 지금의 평화로(옛 서부관광도로)인 웃한길을 통해 제주성에 집결하게 되고 천주교측은 이에 성전을 선포하며 반격을 한다.

치열한 공방 끝에 제주성이 함락되고 700여명의 천주교도가 죽음을 당한다. 이어 관군과 프랑스군이 들어오고 농민군은 반제 반봉건 투쟁의 성격을 띠며 저항하지만 결국 패배하게 된다.

이 때 강우백, 오대현, 이재수 세 장두는 서울로 압송되어 죽음을 당하니 이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 '삼의사비'이다.

이재수의 난 또는 성교난․신축민란으로 불리워지는 1901년 농민반란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을 맺는다.

이재수란은 봉세관 강봉현의 혹심한 작폐와 세금의 과징, 토착종교와의 지나친 갈등, 구마슬을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특수권력과 이에 편중한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반발해 일어난 반천주교 운동이며 봉건적 수탈에 항거한 반봉건 운동이었다.

# 혜택보다는 착취와 수탈의 대상

제주는 한반도의 부속 도서로서 옛부터 중앙의 혜택보다는 착취의 대상이었고 수탈의 역사였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속에 세종때 고득종이 한성부판윤(지금의 서울특별시장)에 오른 것을 빼고는 중앙의 고위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그것을 입증해 준다.

사실 세종때 고득종이 고위관직 진출은 세종의 총애와 함께 조선초 제주가 우마의 생산기로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제주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주의 유력층에 대한회유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주지방의 유력층들은 점차 서울에 올라가 재경사족(在京士族) 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고득종도 그중 하나였던 것이다.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고 마소를 키우며 가장 강한 공동체에 뿌리 박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외세는 분명 거부해야 할 대상이었다.

가을의 한적함과 뒤의 단산을 옆에 끼고 가냘픈 몸짓으로 한들거리는 이름 모를 꽃과 눈맞추며 외롭게 서 있는 '삼의사비'는 1백여년전의 제주의 정신을 기리며 공동체마저 흔들거리며 시나브로 파괴 되어가는 제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무슨 말인지 하는 듯하지만 귓가에만 맴돌뿐 아무말이 없다.

19세기 이후만 돌아보더라도 이곳 제주에만도 1813년 양제의 난, 1862년 강제림의 난, 1890년 김지의 난, 1891년 이완평․현계현의 난, 1896년 신제개혁 반대운동, 1898년 방성칠의 난 그리고 1901년 이재수의 난 등 저항의 역사였다.

그것은 이후 일제치하의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며 4․3의 골깊은 역사로 이어지는 민중의 삶이었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시작된 이곳 대정에서 제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제주의 역사 한 페이지를 전해주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방성칠난과 비교하여 그래도 이렇게 초라한 비석이라도 서 있어서 후세들에게 역사적 사건을 알게 해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