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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믿기는 뭘 믿었단 말이냐

아! 가파도....무욕의 땅 너를 그리며

by 여랑 2011. 4. 27.

알뜨르비행장을 뒤로하고 송악산으로 차를 돌리니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해안길은 푸른바다 위에 조각처럼 떠 있는 형제섬을 끼고 돌아 송악산으로 연결된다.

송악산은 해발이 104m 밖에 안되는 뒷산같은 오름이지만 동․서․남 세면이 바다쪽으로 불거져나온 10~14m의 기암절벽으로 그 정상에서 태평양을 관망하는 경관은 시원함을 넘어 장쾌함을 준다.

동쪽으로는 우뚝 솟은 산방산과 단산, 그리고 사계리부터 서귀포까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해안선이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옛 대정현이 한눈에 조망된다.

남서쪽으로는 마치 바다에 놓은 징검다리 같은 가파도와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이 보이며 코앞에 떠 있는 형제섬은 인상적이다.

대정에서 약 5.5㎞ 떨어져 있는 가파도는 면적이 25만8000여평으로 마라도 9만여평보다 2.8배 정도가 크다. 길이는 남북이 1.6㎞, 동서가 1.5㎞이다.

가파도 주변은 파도가 거칠어서 선박의 표류가 많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1653년 네덜란드의 선박 스페르웨르호가 표착한 사건이었다. 우리들에게 하멜표류기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선박의 서기 핸드릭 하멜은 우리나라에서 13년동안 억류생활을 하다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저술한 하멜표류기에 표기된 퀘파트(Quepart)가 가파도이다.

가파도는 원래 국유 우마목장이었으며 조선 중기까지 무인도였는데 영조 26년(1750년) 정언유 목사가 이 섬에 소를 풀어놓아 목장을 개설하면서부터 사람이 왕래하게 됐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헌종 8년(1842년) 이원조 목사때 지역민인 이광렴이 개간허가를 얻어 농번기에만 왕래하다가 고종 2년(1865년) 대정 지역이 큰 흉작이 들어 지역민들이 가파도에 정착하면서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최초로 입도한 사람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파도의 사람이 살게된 역사는 이렇게 짧지만 섬이 낳은 인사는 우리 격동의 근현대사의 한 폐이지를 장식한 사람들이 있다.

# 가파도의 두 인물 김성숙과 김한정

다름아닌 김성숙과 김한정이다. 1897년 가파도 59번지에서 태어난 김성숙은 경성제일고보에서 학교생활을 하던중 3․1독립운동과 관련해 투옥돼 옥고를 치른후 1921년 고향에 내려와 현 가파초등학교의 전신인 신유의숙을 설립하고 민족교육에 들어간다.

해방이 되어서는 진보적인 한국사회당으로 입후보하여 5대 민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하는데 당시 가파도 주민들은 3표를 제외하고 모두 김성숙을 지지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소설가 현기영씨는 "의정활동 중에서도 4․3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으며 제주출신 재경유학생을 모아놓고 4․3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몇 년전에는 가파도 출신인 김성숙을 추모하기 위해 문하생들과 주민들이 뜻을 모아 가파초등학교 입구에 그의 동상을 세워 그의 찬연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 한사람 김한정은 신유의숙이 설치되자 8년간을 가파주민들의 교육과 문화향상을 위해 온몸을 던진 인물이다.

1931년 제주도야체이카 사건으로 검거돼 5년의 수감생활을 하는 등 항일투쟁에 전력했고 해방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제주도부위원장을 맡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46년 삼천포 부근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운명을 달리한다.

그가 죽자 전도민민의 애도속에 사회장으로 엄수되었고 도내 좌․우익 모든 인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한다.

가파초등학교에 신유의숙 공로비를 세울 때 당국에서는 사회주의 활동가라는 이유로 그의 이름이 오르지 못하도록 종용했으나 가파도 주민들이 탄원서를 올려 그의 이름이 공로비에 오를 수 있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그의 인물됨이 남달랐음을 말해주는 대목일게다.

송악산 정상에서 가파도와 마라도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수평선에 걸리려는 해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최근에는 가파도에 2009년부터 청보리 축제가 열리고 올레길도 개발돼 많은 관광객들이 가파도를 찾고 있다.

특히 매년 4월에 열리는 청보리 축제는 가파도를 둘러싸고 있는 쪽빛바다와 대비되며 바람에 나부기며 살랑살랑 넘실대는 청보리밭을 조망하는 광경은 더없이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또한 가파도에서 바라보는 산방산과 한라산의 모습은 섬에서 본섬을 바라보는 또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언제 한번 가봐야겠다는 기약만하고 있는게 아쉽다.

저항과 유배의 자취, 그리고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더듬은 오늘 하루가 뿌듯함 보다는 형언할 수 없는 무거움으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먼저 시작한 '떠나가는 배'를 소리낮춰 부르는데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 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 곳이 어드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너머로 어둠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우리 언제 다시 만날까
꾸밈 없이 꾸밈 없이 홀로 떠나가는 배
바람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