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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믿기는 뭘 믿었단 말이냐

하늘아래 첫동네 그리고 그속의 사람들

by 여랑 2011. 4. 30.

하늘은 적당히 낮아 있었고 전형적인 봄날씨에 내려쬐는 햇살이 바람이 안드는 어느 구석진 곳을 골라 낮잠이라도 청하고 싶을 정도로 포근하게 세상을 끌어 안았다.

노형을 지나 시내를 완전히 빠져나오면서 펼쳐지는 산과 바다에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편안히 차창에 기대 상념에라도 잠기고 싶어진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볕이 정겨울 정도로 포근하다.우리는 오늘 솔도와 광평리 그리고 헛묘, 삼의사비, 대촌비행장등 서부지역의 답사를 하기로 했다.

# 옛 '웃한질'이 이제는 4차선 포장길로...

차는 유수암 단지를 지나 경마장 가까이 가고 있다. 서부산업도로(평화로), 이제는 말끔히 왕복4차선으로 포장되었지만 25년 전만해도 이 길은 웅덩이와 자갈까지 깔리고 양쪽으로 가시덤불이 우거져 작은 우마나 지나갈 수 있는 좁을 길이었다.

옛날 대정현 사람들이 이 길을 통해 제주성의 일을 보러 다니던 길이다. 차는 어느새 경마장을 지나고 있다.지금은 한가하지만 주말 낮이면 주차장에 빼곡히 들어선 차들로 발딛을 틈도 없다고 한다.

요즘은 주말이면 하루에 4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나. 아무리 그렇게 도민의 쉼터,관광의 명소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렇게 변해진 모습에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제주의 옛 삶의 터전들이 순간의 스트레스 해소용이나 오락장소로 변해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변해갈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답사팀 모두를 우울하게 했다.

생활의 터전이었고 마소가 뛰놀며 풀을 뜯던 그곳엔 이제 넓디 넓은 트랙과 건물들이 들어서있고 오름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골프장들이 오늘은 어느 골짜기를 파헤치고 있을까.

역시 나는 세계적 관광지 제주보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제주가 더 정겹게 느껴진다. 차는 벌써 솔도 입구인 호명목장 입구까지 와서 좌회전을 한다.

내가 알기로 솔도로 들어가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하나는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광평리로 해서 들어가는 길이다. 물론 내가 알기에 솔도가 무슨 문화유적지나 역사적 기록이 있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곳에 우연히 왔었을때 이렇게 깊은 한라산 품속에도 동네가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 하늘아래 첫 동네 '솔도'

 한라산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즉 제주도에서는 하늘아래 첫 동네인 셈이다. 지금은 많은 길이 포장되어 가깝게 느껴진다지만 전에는 산업도로 위로 가볼때가 조상님 묘를 찾아 벌초하는 때가 아니면 거의 없었다. 솔도는 서부산업도로에서도 한참을 더 한라산 쪽으로 들어가 있는 마을이다.

화전마을 솔도의 옛모습

우리가 도착했을때 솔도는 거의 평온한 분위기에서 잠자는 동네 같았다. 불과 1990년대 초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마을에 이제 전기는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앞에 한라산이 우뚝 서 있고 서쪽으로 코앞에 영아리오름이 있다.

그러니까 솔도는 그 한라산 줄기에서 이어진 영아리오름 밑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옛날에는 여러 가호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모두 떠나고 목장을 관리하는 육지사람과 서너 가호만이 오늘의 솔도를 지키고 있었다.

넓은 밭에 목초의 풍경이 꼭 멀리서 보기에 보리가 바람을 타고 출렁이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한층 즐겁다. 어느 시인의 싯귀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렇게 어려운 농촌에서도 그들이 농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저렇게 봄이면 출렁거리는 초록빛 풀들이 가슴속에 촘촘히 박혀있는 모습때문이라고 그는 노래했었다.

# 한가로이 노니는 병아리의 모습만

과거에 '○○초등학교 솔도분교'쯤이나 했었을 듯 싶은 교사같이 보이는 건물에는 봄날의 햇살속에 한가로이 노니는 병아리와 그 어미 닭들의 정겨운 모습뿐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어디 들에라도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동네를 한바퀴 둘러봐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안보인다. 우리는 구멍가게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초라한 집에서 주인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어 소주 한병을 갖고 지폐를 그 자리에 눌러둔채 그곳을 나왔다. 그 집들 뒤로는 대나무숲이 무성해 그 옛날 마을의 번성을 증명하는 것같아 마음이 안타까워진다.

- 이제는 화전마을 솔도로 들어가는 길이 아스콘 포장이 되는 등 도로환경이 너무 좋아져서 예전과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한다. 더구나 솔도 위에는 나인브릿지 골프장이 있고 바로밑에 타미우스 골프장, 그 밑에 아덴힐골프장까지 생겨서 화전마을 솔도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한껏 훼손돼 버려 가끔 갈때마다 아쉬움을 느낀다.

- 포장도 안된 예전의 그 자갈과 흙으로 된 길을 걸으며 올랐던 느낌이 안오는 것은 20여년이란 세월때문인지 이곳 환경이 너무 많이 변해버린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솔도에서 50여분을 머무르고 광평리고 향했다. 왔던길을 택하지 않고 광평리로 통하는 길을 택했다. 광평리는 솔도 바로 밑에 있는 마을.

광평리로 내려가는 길가엔 삼나무가 가로수로 빽빽히 심어져 있다. 하늘을 향해 쑥쑥 올라간 삼나무들,하지만 이 나무들이 삼나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많았다. 사계절이 연중 푸르른 삼나무, 그것은 너무나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요소중의 하나였다.

솔도에서 광평리로 가는 예전의 삼나무 가로수길. 지금은 삼나무가 모두 잘려나가 황량하다.

제주시내에 있는 가로수들도 종려나무나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고 푸르게 남아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계절이 흘러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당국에서는 도내 가로수 전환계획을 세운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도민들이 즐겨찾거나 관광객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가로수 길은 사실상 없는 형편이니 가로수 정책이라는게 있는 것인지 조차 의문을 던질때가 많다.

# 소담스럽게 얘기나누며 걷고 싶은 오솔길

차를 타고 솔도에서 광평리까지는 도보로 약 20여분 걸리나 차로는 5분여의 거리이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문명의 이기를 비판하면 그것은 너무 기회주의자일까. 그렇지만 이러한 길은 다정스런 친구나 동생, 아니면 연인이라도 좋고 이렇게 여럿이 모인 답사팀끼리라도 소담스럽고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광평리에 도착했다. 광평리(廣坪里),옛날에는 화전민 마을이었고 저 유명한 방성칠난의 근원지이기도 한 마을. 옛날의 영화는 간데없고 이제는 목축을 하는 열다섯여호 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고 그것도 토박이는 몇가구 안된다고 한다.

산간마을이라는 교통의 불편함과 사회의 산업화 속에 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도시로 가서 오늘은 어디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달래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고향을 잊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구한말까지의 봉건사회가 지속되는 동안 제주에도 수많은 민란이 있었다. 특히 정조 이후 순종․헌종․철종으로 이어지는 세조정치속에 전국 각지에서 난이 일어났고 대정현이 있었던 이곳 대정․모슬포 지역은 제주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난이 근원지였다. 항상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 어렵고 힘든것은 백성들이었다. 이 곳 정의현만 하더라도 대표적으로 1898년의 방성칠난, 1901년의 이재수난(성교의 난)등이 있다.

이곳 광평리 주위의 솔도나 무등이왓 등에는 구한말에 동학란의 제주 유입자들과 함께 많은 화전민 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조선정부에 대해 반정부적 성향을 뚜렷이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제주목사는 화전민에 대한 수탈을 가일층 강화함으로써 광평리 중심의 결사가 형성되고 방성칠 노인을 장두로 삼고 전도에 사발통문을 띄워 제주성을 점령하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난은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3녀후 다시 이 대정현 지역에서 이재수난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구한말까지의 주요 항거지는 정의현 지역이었으나 일제로 넘어 오면서 그 항거지가 조천, 세화쪽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풀어볼 필요가 있다.

# 부패와 수탈에 대한 투쟁의 역사

광평리 거리 모습

봉건시대만 해도 조천,구좌지역은 토착세력의 지배자들이 살던 곳이었다. 특히 화북포나 조천은 제주의 갑부나 유림들이 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반정부적인 난이 일어날수가 없었다. 오죽해야 난이 일어나면 목사가 화북이나 조천으로 피하고 그들에게 원군을 얻어 반격을 시도하려고 했었을까.

반면에 대정현은 모진 바람과 척박한 땅에 억척스럽게 살면서도 관리의 부패와 수탈이 심하여 민(民)의 동요가 없을 수 없는 지역이었으니 민란의 요소는 어느새 잉태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치를 당하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분노한 것은 일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유림들 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떤이는 의병장으로, 어떤이는 자결로,또 어떤이는 글로써 패망의 서러움을 달랬다.

그래서 바야흐로 투쟁의 역사는 대정현에서 조천쪽으로 넘어오게 되는데 조천만세운동, 세화리 해녀투쟁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대정현의 저항의 불씨가 꺼진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이 되고 4․3이 터질때 이곳 대정쪽의 사람이 상당히 많았었다는 것에서 그 저항의 뿌리깊은 역사를 더듬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방성칠난을 기념하거나 회상할 수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다. 단지 제주의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는 몇몇 사람만이 자료을 찾아보고 관심을 가져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제주의 작가 현기영 선생의 장편소설인 '변장에 우짖는 새(1983)'가 바로 이 방성칠 난을 그리고 있어 나 자신도 감명깊게 읽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기영 선생을 존경한다. 제주가 배출한 이름있는 문인들이 그분말고도 여럿 있지만 그중 선생은 제주의 역사에 가장 많은 애착을 갖고 있는 분으로 꼽을 수 있다.

선생은 1979년 '순이삼촌'으로 오랫동안 금기시됐던 4․3을 세상에 꺼내놓았으며 86년 '아스팔트', 89년 '바람타는 섬', 94년 '마지막 테우리' 등 제주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고집하고 있다.

자기자신은 그것이 가장 부담스럽다고도 하지만 선생의 그 고집만은 계속 이어 갔으면 한다. 선생은 이 무명의 사람을 기억하지 못해도 선생과 몇번의 술자리는 시쳇말로 해서 아주 영양가 있는 자리였다.

그가 하는 말중에는 고향 후배로서,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녹아 있었다.

변방을 맴돌다 최근 차관급인 한국문예진흥원장에 취임하면서 조용한 자기스타일의 개혁을 해나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은 역사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설이 픽션의 정의에 묻혀버리면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시대나 지금의 시내나 현실이 픽션을 압도하는 시대에서 현실은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허구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참혹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선생은 소설이 반드시 픽션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갖지 않는다고 했다.

이곳 광평리의 역사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 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자위해 본다.

광평리 마을이 세워진 곳에서 서쪽으로 난 좁은 길을 더듬어 눈길을 주니 수많은 대나무숲이 보인다. 그것만이 옛날에 이곳이 큰 동네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옛날 제주에는 항상 마을이 형성된 곳은 대나무가 있었다. 그것은 지금 폐촌이 되어버린 마을을 방문하면 으레 대나무 밭이 나오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대나무가 생활의 중요한 재료로 쓰였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플라스틱이니 뭐니해서 편리한 물건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때만 해도 대나무는 긴요한 생활 수단이 되어 주었다.

동고량(도시락통), 차롱, 물허벅통 등 대나무는 생활에 요긴하게 쓰였고 심지어 제사에 고기를 꿰는 도구로도 쓰였으니 그 당시의 대나무의 중요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4․3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살아십주"하는 어느 촌로의 말을 새기며 우리는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