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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이야기 제주역사24

제주의 빼어난 경치 - 영주십경(하)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폭포로서, 특히 한여름의 폭포수가 하얀 비단처럼 쏟아져 내리는 장관을 정방하폭(正房夏瀑)이라 하여 영주 10경의 하나로 꼽는다. 너비 8m, 떨어지는 높이 23m, 깊이 8m이다. 서귀포 해안의 기암절벽과 숲 우거진 바다위의 섬들, 그리고 멀리 한라산의 웅장한 모습과 함께 높이 23m 절벽에서 무지개를 그리며 고꾸라지듯 쏟아져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하기 그지 없다. 산세가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산방산에 있는 굴사를 말한다. 그 근처에 송악산과 어우러진 "산방굴사" 이 곳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굴 안은 석벽으로 병풍을 둘러친 듯 하다.옆에 있는 단산(簞山)의 날카로움이 한창인 젊음의 매력이라면 산방산은 인생의 의미를 알아가는 점잖은 중년신사의 매력이랄까. 그 산방산을 .. 2011. 11. 23.
제주의 빼어난 경치 - 영주십경(상) 영주십경---제주의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10가지 경관 성산일출, 사봉낙조, 녹담만설, 산포조어, 영실기암 정방하폭, 산방굴사, 고수목마, 귤림추색, 영구춘화 일출봉 굼부리를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크고 작은 99개의 석봉이 마치 커다란 성곽을 이루고 있다하여 성산이란 이름이 유래된 성산일출봉에서 해돋이 경이로움은 영주십경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는다. 사라봉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의 경치를 가리킨다. 저녁 노을 구경은 노을만을 보는 게 아니라 절벽 밑의 고래굴의 물결과 주변 여러 마을의 물들여진 저녁 연기를 함께 구경하여야 한다. 사라봉에서 석양을 바라보면 마치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어 불타는 듯한 장면과 함께 인생을 뒤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석양에 물들어 잔잔히 물든 바다위에 가뭇가뭇 보이는 .. 2011. 11. 23.
삼별초, 탐라인에 그들은 항쟁군이었을까 외세였을까?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무수천에서 중산간으로 가는길과 중문-서귀포로 가는 평화로의 갈림길에서 중산간으로 길을 잡고 광령리를 넘어서면 고성리에서 항몽유적지를 만날수 있다. 항파두리성은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였던 최후의 보루였다. 고려중기 무신들이 문신들을 밀어내고 조정을 틀어쥐어 60여년간을 좌지우지 했다. 이의방으로 시작된 무인정권은 정중부와 이의민, 경대승, 최충헌, 최우 등을 거쳐 몽고침략을 맞으면서 막을 내린다. 삼별초는 그 탄생을 무인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대에 야간 경비를 하던 부대로 '야별초'가 있었고 이 야별초는 후에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다. 고종 18년(서기 1231)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그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고려군이 기회를 보아 탈출하여 오자 이들.. 2011. 10. 21.
제주의 원형질, 그 질감의 느낌은? 제주도전통민속마을로 지정된 성읍리는 예전 정의현의 현청소재지였고 이에따라 성곽도 설치되었다. 정의성은 높이 4m, 둘레 756m로 세종5년(1423) 왜구 방어와 정의현 보호를 목적으로 축성했다. 태종17년 정의현감 이이(李貽)는 전라도 관찰사를 통하여 당시의 실정을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으라는 교지가 있사오나 이 곳에 합속된 4현이 한라산 남쪽에 연달아 있어 만약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는다면 호아현, 홍로현은 相去가 3식(1息은 30리)이 남짓하므로 그 곳 백성이 왕래하며 공사나 목장을 고찰하는 일 등에 있어서 그 폐가 적지 않으니 정의의 중앙지인 서촌 眞舍(晋舍)나 토산 중에서 지리가 可當한 곳에다 읍성을 설치함이 타당하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 정의현청 소재지 성산읍 고성리에.. 2011. 10. 19.
선비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충의사(忠義祠)는 청주한씨 서재(恕齋)공 한천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한천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밑에서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정몽주 등과 함께 조선을 개국하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를 탄핵하는 등 공략하다 1392년 제주로 유배되는 인물이다. 그는 곧 유배가 풀렸지만 돌아가지 않고 표선면 가시리에 정착하여 청주한씨 제주입도조가 된다. # 청주한씨 제주입도조 '한천' 1392년 유배 청주한씨 제주문중회에서 조사한 사료에 따르면 서재공은 고려 멸망과 동시에 부인과 두 아들을 거느리고 개성을 출발 정읍, 해남을 거쳐 해로로 성산포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인가가 없는 이 곳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예전의 충의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600여년된 전통올레 처음.. 2011. 10. 19.
하원동 傳왕자묘 석상의 비밀<하> 무덤을 지키는 한국의 대표적인 이국풍 석상은 통일신라시대 경주 괘릉의 무인석과 문인석상이라고 할 수 있다. 괘릉의 무인석은 이란인이고 문인석은 위구르 인이다. 그러나 이 양식은 이후 전래되지 않은 채 괘릉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또한 경기도에 있는 이애(李?(1363~1414)와 태조의 8남 5녀 중 맏딸인 경신공주 무덤의 무인석은 몽골의 복식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석상인데 한눈에 봐도 이국풍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주의 傳왕자묘 문인석상도 숱한 한국 무덤 석상 가운데 희귀한 이국풍이다. 원래 한국의 문·무인석은 당나라의 묘제에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시대에 정착되었다. 이것이 고려에 계승되면서 공민왕릉의 묘제(墓制)로 양식화되었고, 이 묘제는 이후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 무덤 .. 2011.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