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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이야기 제주역사24

하원동 傳왕자묘 석상의 비밀<상> 몽골 초원을 답사하노라면, 광활한 대지 곳곳에 할석을 땅에 박아 사각형으로 만든 돌궐식 묘지가 눈에 띈다. 또 간간히 사슴문양을 새긴 아름다운 암각화 석주들, 우리네 거욱대와 같은 어워가 사람을 맞는다. 제주 문화가 약 100년의 몽골 지배 동안 문화적 습합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목축, 언어, 의복, 음식 등에서 아직도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제주의 동자석 또한 한반도와는 다르지만, 오히려 알타이계 석상과 유사한 특징이 많다.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문화전파설은 차치하고라도 문화의 동시적 발생과 등장은 우연치고는 너무 유사한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석상 좌우로 세울 때 각기 다른 손 올라가는 것, 자연에서 배운 대칭 감각 제주에 '개역'이 라는 음식이.. 2011. 4. 30.
돌하르방-제주의 어제와 오늘 두번째 관덕정이 아무런 말없이 500여년을 지켜오고 있는 건축물이라면 관덕정 사각에 위엄있게 어쩌면 묵직하게 서 있으면서 무슨말인가를 하는 것같은 돌하르방은 색다른 돌문화를 보여주는 제주문화를 물씬 풍기는 석조물이다. 우리나라의 걸죽한 문화재가 탑, 석상, 부도 등 돌과 관련된 것이 적지 않듯이 제주도 돌의 고장이라 불리울 만큼 돌과 관련한 민속자료가 수두룩하다. 이 가운데 돌하르방은 제주의 이미지를 살려주는 민속자료(2호)로 지역민들뿐만 아니라 국내․외 관광객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 ◀관덕정앞 돌하르방 부리부리한 눈, 우뚝한 코, 꾹다문 입, 불거진 뺨 등 어디에 있든 퍽이나 인상적인 돌하르방은 이제는 각종 행사때 로고로 사용되고 상품브랜드로까지 확대되며 제주를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로 굳어지고 있다. 지.. 2011. 4. 30.
관덕정-제주의 어제와 오늘 첫번째 제주의 엣이름은 탐라, 탁라, 영주 등 여러가지로 불리웠고 제주의 명칭은 고려말이나 조선초부터 형성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처럼 제주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탐라시대에 대한 기록은 많이 찾아볼 수 없고 유적도 거의 없는게 사실이다. 또한 고려때까지의 유적도 그리 많지 않아 제주의 고대사를 정리하는데 많은 학자들이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사료나 유적들이 많이서 그런대로 제주의 역사를 복원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조선초기 유적이면서 목조건물로 제주시내에서 대표적인 곳이 관덕정이다. 관덕정은 세종 30년(1448) 당시 목사 신숙청(辛淑晴)이 군사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건축한 훈련청으로 미학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도내에 현존하는 관아건.. 2011. 4. 30.
귀빈사-사람은 한 시대를 살다갈 뿐이고... 제주4.3 발발 63주기를 한달여 남겨두고 있는 가운데 최근 대통령이 이용했던 장소에 대한 사업을 놓고 이견이 대립되고 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4.19혁명이 반백년을 넘긴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씨가 최근 4.19세대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고 이승만에 대한 공과를 객관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욱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에 체류할때 이용했던 숙소를 기념관으로 조성하는 것을 놓고 이견이 나뉘고 있는 것. 그 중심에 있는게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속칭 '귀빈사'로 불리는 별장. 귀빈사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제주에 머무를 때 두 번 사용했던 별장이다. 이 대통령이 국립목장의 설립을 지시하면서 내도가 잦아지자 측근.. 2011. 4. 30.
이야기 역사 - 소길리 석관묘 애월읍 소길리 남쪽으로 평화로를 향해가다보면 소길리 마을운동장이 있고 그 북쪽으로 석관묘가 자리하고 있다. 석관의 크기는 길이 3m, 높이 0.73m, 폭 1m로 모두 6장의 현무암 돌판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눈에 봐도 크게 보여 비교적 많은 돌판으로 이루어진 석곽묘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주민들에에 따르면 일제 때 도굴꾼에 의해 속칭 '자랑못(좌랑못이라고도 함)' 남쪽에 위치한 고분이 파헤쳐진 후 이 석관이 연못 근처에 버려져 있었고 그후 현재 자리고 있는 곳 옆의 속칭 꽃동산 무성한 잡초 사이에 묻혀 있던 것을 지난 1961년 마을청년회가 분실을 우려해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석관묘는 돌로 관을 만들어 매장할때 사용한 것인데 이러한 매장풍습은 있었다고 전해지고는 있지만 제주에서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 2011. 4. 30.
오현단 배향인물 선정의 아이러니 오현단은 제주에 파견된 수많은 관리와 유배객중 제주의 문화와 사상, 정신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낀친 5분을 가려뽑아 그들을 기리기위해 마련한 곳이다. 오현단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인 선조 11년(1578년) 제주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을 추모하여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를 건립한 것이 시초인데 충암묘는 이로부터 80여년후인 효종 10년(1659년) 귤림서원으로 현액된다. 그후 현종 6년(1665년) 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지금의 오현단(구 오현학원 자리)으로 옮겼으며 4년후인 현종 10년(1669년)에는 동계 정온과 청음 김상헌을 함께 배향했고 숙종 4년(1678년) 규암 송인수, 숙종 21년(1695년)에 마지막으로 우암 송시열이 배향됨으로써 오현이 갖춰진다. # 김정.정온.김상헌.송인수.송시열 배향 .. 2011.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