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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700년전 사람들과의 대화

물도 돌고 역사도 돌고 - 탐라 3대 명찰 법화사지

by 여랑 2011. 6. 26.

차는 탐라대학교 입구를 지나 회수로 향한다. 물이 돌아 나오는 곳이라는 회수리 중심에 들어서면 사거리가 나타나는데 16번 국도를 따라 서귀포쪽으로 1.5㎞쯤 가면 길 왼쪽에 법화사 입구 버스정류장과 함께 법화사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250m쯤 들어가면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에 있는 지방기념물 제13호 법화사지가 나온다.

법화사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게 정립된 것이 없는 실정이지만 13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당당한 거찰이었음은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화사의 창건배경으로 원(元)의 순제가 날로 세력이 강해지는 明의 주원장을 염려하여 만일의 경우 피난처로 탐라에 궁전을 지었고 이 법화사지가 바로 그 궁전터라고 하는데 이 설에 따른다면 창건시기는 14세기 후반이 된다.

 

# 창건연대 아직까지 정립된 것 없어

공민왕 16년 무렵 원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순제는 만일의 경우 피난처는 제주도뿐이라고 여겨 사전에 피난처 적격지를 조사하기 위해 몽고인 단장 1인과 중국인 부단장 1인을 파견한다.

이들은 직접 답사를 끝내고 돌아갔는데 그 중 부단장이었던 중국인은 '탐라지략'을 저술했다.이 책은 제주도 통치 단계 등 당시의 제주 상황을 기록하고 있지만 서문만이 전해온다. 순제는 피난처로 타당하다는 보고 결과에 따라 제주에 궁전을 짓게 하는 한편 사신 고대비를 파견하여 제주에 황실의 금은보화를 옮기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말 조선초에 제주에 금은보화가 많았다는 것은 곧 몽고에서 들여온 것으로 나중에는 명나라에 공납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이송된다. 피난궁전 건설은 고려사에 의하면 중단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설은 원래 법화사는 원나라 순제가 피난궁을 지으려고 하기 훨씬 이전인 통일신라시대말기 문성왕 1년(서기 839)으로 보는 설이다.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과 중국 산동성 적산촌,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한 양자강 하류 그리고 제주에 법화사(법화원)라는 같은 이름의 절을 세웠고 면면히 내려오다 원나라 순제때에 와서 크게 중창했다는 것이다.

 

# 발굴조사로 최소 1279년 창건 또는 중창

어쨌든 그동안의 발굴조사로 1279년에 창건됐거나 아니면 크게 중창한 것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으며 원당봉에 있는 원당사지와 외도동에 있었던 수정사지 등과 더불어 고려후기에 존재했던 제주의 대표적 3대 사찰의 하나로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던 절터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법화사에 대해 역사적으로 기록된 것을 살펴보면 현존 문헌중 최초의 기록으로 보이는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6년(1406)에 명나라 사신 황엄과 한첩목아 등이 법화사에 있었던 아미타삼존불상을 요구해서 외교분쟁으로 발전할뻔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내가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 탐라에 가서 동불상(銅佛像)을 가져오도록 하였으니 협력해서 이 일을 성사시켜 달라"고 되어 있고 한첩목아가 "탐라 법화사의 아미타삼존불상은 원(元)의 훌륭한 공인(工人)인 양공이 만든 불상이므로 우리가 직접 가서 가지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태종은 명나라 황제가 이를 구실로 탐라의 형세를 파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주변의 권고에 따라 서둘러 김도생과 박모로 하여금 법화사의 불상을 나주로 가져오도록 했고 명의 사신 황엄과 한첩목아는 나주에서 이 아미타삼존불상을 받아 서울로 돌아온후 얼마간 머물다 떠났다고 적고 있다.

법화사의 불상 반납을 요구한 명의 황제라고 하는 왕은 영락제(永樂帝)이며 영락제는 부모인 주원장 부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남경에 황실의 원찰 대보은사를 세우고 거기에 모실 부처님을 구하게 되는데 가장 원만하고 자비하신 부처님으로 제주 법화사의 아미타삼존여래를 꼽은 것이다.

이때 불상을 감은 감실의 높이와 폭이 각각 7척이었다고 하니 좌대를 제외한 불상 높이만 해도 6척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불상에 대한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 법화사의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명나라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사신을 보낼 만큼 법화사에 안치되었던 아미타삼존불상을 알고 있었다면 불상이 걸작품이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법화사가 상당히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실록에는 태종 8년(1408)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주의 법화사 노비 280명과 수정사 노비 130명을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각각 30명씩만 가지게 하고 나머지는 전농사(典農司)에 속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법화사에 속한 사원전(寺院田) 등 사찰의 규모를 가히 가늠할 수 있으며 탐라에서는 가장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법화사는 15세기 초까지는 전성기를 이뤘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들어 억불숭유정책에 의해 쇠퇴의 길을 걸은 것으로 보인다.

효종 4년(1653) 이원진이 편찬한 '탐라지'에 법화사는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형상 목사가 온섬의 신당과 사찰이 소실되는 불사훼철령이 내려질 무렵 폐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로부터 제주에는 '당오백 절오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연과 신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다. 그래서 도내에는 모두 1만8000신이 있다고 하는 신화와 전설도 있다.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음사를 숭사하여 산․숲이나 하천․연못 또는 낮은 언덕이나 높은 언덕이나  나무와 돌에 모두 신의 제사를 베푼다'고 하고 있고 '중이 모두 절 옆에 집을 가지고 처자를 둔다'고 적을 정도로 민간신앙과 종교가 뒤섞여 성행하면서 불교계가 많이 타락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섬 지방 특유의 생활환경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1273년 본도에서 항거하던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게 평정되고 몽고는 제주에 다루하치 총관부를 설치, 남송과 왜의 요충으로 보고 동방 침략의 근거지로 삼은 후부터 제주는 원에 직속되었고 몽고인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들어온 라마교에 의한 파계도 한몫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것에 철퇴가 내려진 것은 숙종 28년(1702) 이형상 목사가 재임할때이다. 그는 불교계의 타락상을 보다 못해 세속화된 절들을 모두 불지르고 그 잔해를 쓸어버렸다.

또한 각종 당이나 민간신앙으로 행해지던 자리들도 모두 없애버린다. 이후로 '오백'에 이르던 절이나 당들은 그 자취를 감추게 돼 폐단을 없어졌지만 도내 어느 곳에 어떤 사찰이 얼마만한 규모로 존재했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불교 관계기록이 거의 없게 됐다.

                                                  대웅전 앞에 있는 구화루

# 폐사된지 250여년만인 1914년에 부활

 

그후 한일합방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그 길로 출가해 스님이 된 도월선사가 제주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할 즈음에 법화사의 폐사 사실을 전하는 봉려관(蓬廬觀․지금의 관음사 창건 여승)과 함께 1914년 이곳에 조금만 암자를 세우고 법화사 사액을 내걸면서 250여년만에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4․3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육군 제3숙영지로 사용되면서 완전히 소실 된 것을 1971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법화사 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돼 82년부터 발굴조사를 해오고 있다.

맨처음 발굴조사는 1982년 명지대 박물과 조사단에 의해 시작된후 제주대학교 박물관 발굴조사단이 맡아 이어갔는데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려 당시의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100평 규모였으며 건물앞에는 고려 궁궐의 만월대와 같이 넓게 조성된 월대가 있었다.

또 이곳에서 출토된 운룡문(雲龍文)․봉황문(鳳凰文)이 새겨진 수막새 역시 만월대에서 출토된 것과 같다고 하는데 이렇듯 월대를 갖춘 건물기단도 드물고 절터에서 운룡문의 막새가 발견된 예는 법화사를 제외하고는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엉강이가 긴 평기와 출토는 신라시대 유물로서 법화사 창건시기에 대한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기단부의 지대석을 2단으로 처리해 면석이 놓이는 자리에 턱이 생기도록 한 것도 독특한 방식이다.

더구나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지원6년기사시 중창16년기묘필(至元六年己巳始 重刱十六年己卯畢)'이라고 새겨진 명문 와당이 발견됨으로써 최소한 법화사의 창건이나 중창이 1279년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또한 요사채로 추정되는 건물에서는 대량의 기와 매립 무더기군을 비롯해 앵무새문, 대접류, 두침, 잔탁, 국화문 접시 등 다양한 문양의 많은 종류의 그릇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들 모두는 최상품 도자기로서 한강 이남에서는 보기 드문 유물로 규명되고 있다.

법화사는 뒤쪽으로 작은 산봉우리를 등지고 동서방향의 양옆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에 감싸여 전체적으로는 동서로 길게 늘어선 가람배치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절 마당 앞에서는 연화지가 발굴되는데 호안석이나 퇴적층의 깊이로 봐서 구품연지임이 확실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구품연지를 가진 사찰은 익산 미륵사터와 불국사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드물다고 한다.

현재의 법화사 대웅전 건물은 1988년 원래 법화사 대웅전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며 1994년  대포동 민가(대포동 2004번지 이성림씨)에서 법화사 주초석(柱礎石)이 발견되어 구전되어 오던 대포리 절터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더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법화사는 왕실의 사찰이었고 규모가 엄청났으며 삼별초가 제주에서 패퇴한 1273년에서 6년후인 1279년 대원제국을 꿈꾸던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의 공주이면서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장목왕후의 원찰로 창건 또는 중창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부터 법화사는 국가가 지정하는 비보사원(裨補寺院)이 되어 국찰이 되었으며 충렬왕과 그의 아내 장목왕후는 1284년과 85년 두 차례에 걸쳐 친히 법화사에 행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