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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700년전 사람들과의 대화

소원은 이뤘건만 역사는 저물어

by 여랑 2011. 4. 26.

그동안 장마로 찌뿌둥하던 날씨도 장마전선이 북상으로 가고 마파람으로 인해 불쾌지수 높던 바람도 멈춰 찌는듯한 뜨거움속에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하늬바람이 조금은 솔솔 불어오는 아침이다.

평소처럼 모이는 장소에 나왔지만 회원들은 전부 모이지않고 해는 여름이라 9시인데도 하늘 중천에 떠올라 있다.시간이 지나가는데도 정작 중요한 차를 갖고 와야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시간은 10시에 가까워지고 할 수없이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삼양검문소 입구에서 다른 회원들을 만나기로 했다.

멀리서 본 원당봉 모습

오늘의 답사는 원당봉. 멀리서 보이는 원당봉은 소나무로 우거져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농로와 같은 포장길을 따라 가노라니 촌로가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사실 원당봉을 오르는 길도 몰랐다.

그 할머니에게 길을 물어 원당봉으로 오른다.

이 오름은 옛날 고려시대때 원나라 황제가 아들을 원해서 원당사를 짓고 그 안에 5층석탑을 세워 불공을 들였다는 곳이다.

원당사는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인 충렬왕 26년(서기 1300) 원나라 순종이 왕자를 얻기위해 세웠다고도 하고 순제(혜종이라고도 함)의 황후인 기황후의 지시로 창건됐다고도 전하고 있다.

'원당'이란 이름에서도 원나라 황실의 원찰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오름이 원당봉으로 불리워 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원나라 순제에는 태자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북두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 밑에 탑을 세워 불공을 드려야 한다는 승려의 계시를 받아들여 이곳을 적지로 선택하게 되어 이 곳에 원당사를 짓고 사자를 보내어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기황후란 고려 사람으로 관료였던 기자오(奇子敖)의 딸이며 기철(奇轍)의 누이인데 1333년(충숙왕 복위 2년) 원 왕실의 궁녀가 된후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았으며 딸을 하나 낳았다.

1335년 순제의 황후가 죽자 순제가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으나 권신(權臣) 바이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39년 황태자 아이유스리다례를 낳았고 다음해 1340년 4월11일 제2황후에 책봉되었다.(이 기록으로 보면 기황후의 발원에 따라 절을 세웠다는 앞의 주장은 틀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황후가 되자 실권을 장악하여 쇠운이 깃든 원나라를 극도의 부패와 혼란에 빠지게 하였으며, 고려 조정에도 큰 영향을 끼쳐 기철 일파로 하여금 탐학과 횡포를 자행하게 하였으므로 이 후 공민왕의 자주운동 때에는 기철 일파의 세력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국사책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처음 절이 세워진 연대에 대해 기황후의 지시로 1300년에 창건했다는 설은 시차로서 들어맞지 않는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기철의 누이가 원의 궁녀로 들어건 것이 1333년이고 황후가 되는 시점은 1340년인데 1300년에 세워졌다면 40년이라는 시간차가 발생하는데 기황후가 세웠다면 1340년 경이거나 그 이후일 것이다.

일설에는 원당사가 외도동에 있었던 수정사 창건(1300년)과 같은시기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옳다면 원당사는 기황후와 무관한 사찰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기황후와 관계없이 태자가 없어 고민하던 원나라 제11대 황제 순종이 북두칠성의 명맥이 있는 삼첩칠봉 밑에 탑을 세워 불공을 드리야 한다는 말을 듣고 풍수사를 각처로 보내 살펴본후 이곳이 적지로 여겨 창건됐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아무튼 기황후는 1365년 제1황후인 바얀 후투그가 죽자 정후가 되고, 우여곡절끝에 1370년 순제가 죽자 아유르시리다라가 북원(北元) 소종(昭宗)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황태자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으로 원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결국 1368년 주원장(朱元璋)은 명(明) 나라를 세우고 북벌(北伐)을 단행하여 원(元)을 멸망시켰다.

기황후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라는 내몽고로 쫓겨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 이미 원나라는 예전의 모습이 아닌 완전히 국운이 다한 나라였으며 기황후의 행적도 몽골 지역으로 패퇴한 뒤 전해지지 않으니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어쨋거나 우리나라 보물 1187호이고 제주도유형문화제 1호인 이 5층석탑이 있었던 원당사지 창건연대가 이처럼 오락가락 한다는게 아쉬울 뿐이다.

                                    1935년 당시의 불탑사5층석탑

 어쨌든 원당사는 폐사된지 오래고 현재 이 자리에는 불탑사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비구니 사찰이 들어서 있다.

원당사가 폐사된 것은 18세기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효종 4년(1653) 이원진이 간행한 '탐라지'에는 원당사가 등장하지만 숙종때 제주목사 이형상이 저술한 '남환박물(1702)'에는 이미 성안의 모든 절이 폐사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폐사된 사찰이 한 두개가 아닌 것처럼 이곳 원당사도 절이 헐리고 탑은 파묻혀졌던 것이 1929년 안봉려관(蓬盧觀․지금의 관음사를 창건한 여승) 등이 이 터를 찾아내어 일으켰다.

지금은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절이 마주하고 있는데 하나는 조계종의 원당불탑사이고 또 하나는 태고종의 원당사인데 5층 석탑은 원당불탑사 경내에 있으며 땅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복원시킨 것이다.

석탑은 불탑사의 안쪽 깊숙한 뒤뜰에 자리하고 있는데 들어가는 입구가 너무나 우수꽝스러웠다(지금은 잘 정돈돼 있지만). 여느 절집과 같은 일주문이 아니라 한옥대문인지 양옥대문인지 구분하기 힘들뿐더러 가정집이나 성곽의 암문을 연상케하거나 꼭 개구멍같은 작은 문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비좁고 폐쇄적인 문을 통해 들어가서 대웅전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제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려시대 탑인 오층석탑이 홀로 외로이 모습을 드러낸다.

 석탑은 도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린 다공질 현무암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위로 탑을 쌓은 형태였다.

탑에 조각이나 기타 예술적 조형물은 없고 탑신도 다보탑이나 석가탑 등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된 정제미 없이 아주 수수하게 서민적으로 서 있다.

탑은 1층 기단 위에 5층탑으로 구성되었으며 높이 395cm, 측면 너비 84cm, 정면 너비 89c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그렇지만 탑은 고려시대의 조각수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상층기단부 중대석에는 장방형의 테두리 안에 박쥐날개 모양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부의 각 층을 구성하는 몸돌이나 지붕돌의 모생새는 지극히 단순하다.지금의 불탑사5층석탑

 몸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바닥면보다 윗면이 약간 좁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1층 몸돌에는 정면 남향으로 기로 10㎝, 세로 20㎝ 정도 되는 감실이 패여 있으며 지붕돌 역시 솜씨나 치장을 부리는데는 인색해 네 귀퉁이 처마 끝만 살짝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1988년 상륜부를 치장하는데 쓰이는 보주모양의 석제유물이 발견됐는데 철이 꽂혀 있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봐서 원래의 상륜부에는 철제 찰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받침돌의 3면에는 연꽃무늬가 음각되어 있고, 한 면에는 네모난 홈이 있다. 탑의 맨 위에 있는 진주 모양의 조각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탑의 층수를 각 5층과 7층으로 구분해 표기한 안내문이 2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는 상층부의 2개를 층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에 따라 학자들간에도 5층탑이다, 7층탑이다는 이견이 있었던 때문인데 이제는 5층탑으로 대체적인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우리는 불탑사에서 나와 원당봉 정상으로 오른다. 정상에 올라보니 분화구인듯한 곳에 절이 또 한채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분명 분화구였다. 옆으로 그 분화구를 따라 산책로가 있다.

남측에 있는 최고봉에 오르니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시원스레 트인 삼양바다가 보인다. 분화구 주변에는 여름이라 그런지 몇몇가족들이 더위를 피해 서늘한 느늘을 찾아 피서를 온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부처님의 자비를 빌어 아들을 얻었으나 역사는 이미 저물어 버렸던 전설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