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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700년전 사람들과의 대화

수정사지 - 그 화려했던 날은 가고

by 여랑 2011. 4. 30.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지는 1600여년이 넘어가지만 제주에 불교가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한 추적은 아직 정확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제주에는 1만800여 신이 존재하고 한때 ‘당오백 절오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속신앙과 불교가 공존하면서 뒤섞여 주민들 곁에 있었지만 척박한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화려하고 융성한 불교문화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18세기 이형상 목사 부임 이후 도내 사찰이나 민간신앙에 대한 일대 정리가 진행되면서 불교유적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200여년동안 겨우 명맥만을 이어오게 된다.

제주에는 ‘당오백 절오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과 절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육지처럼 큰 사찰이 500개나 됐다는 것은 아니라고 추정된다.

이는 당시 제주의 인구수나 경제력을 가늠만해봐도 불가능한 수치인 것을 추정한다면 이는 민간에 토속신앙과 불교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뒤섞여 다양하고도 널리 퍼져 있었음을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추정해보면 제주에는 고려시대부터 규모가 적지 않은 사찰이 16세기까지 3~4개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알려진다. 

그중 하나가 지금의 제주시 외도동에 있었던 수정사지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수정사는 고려 충렬왕 26년(1300)에 원나라에 의해 세워진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의 외도동 도근천 서쪽에 있었다.

산북에서는 가장 큰 사찰로 조선초기까지만해도 노비를 130명이나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있는 사찰이었으며, 이에 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탐라록에 태종 8년(1408) 2월28일자에 '의정부에서 제주의 법화사․수정사의 두 절에 있는 노비 수를 정하도록 아뢰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뢰기를 '제주목사의 정문(呈文․밑에서 위로 올린 글)에 따르면 주경(州境) 비보사찰(裨補寺刹․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절)이 두 곳 있는데 수정사에는 현재 노비가 130인이 있고 법화사에는 280인이 있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두 절의 노비를 다른 사찰의 예에 의하여 각각 30인만 주고, 그 나머지 382인은 전농(典農)에 부치십시오'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적고 있다.                     
   수정사지에서 발굴된 유적들▶

또한 중종 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충청도 금산을 거쳐 제주에 유배되었던 충암 김정은 제주유배기간 중 불자인 고근손의 요청에 의해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靜寺重修勸文)을 지어주었는데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다.

생각해보니, 원대부터 있던 오래된 것이면서 아직도 우뚝 홀로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도근천의 수정사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 기와와 서까래가 깨지고 벗겨졌는데, 그것이 장차 무너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생각을 강개하게 먹고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그 옛것을 보존하면서 그것을 다시 건설하였다.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와서 문장을 구함에 무척 열심히 하였다. 이에 그 객에게 답하는 현식의 문장을 써서 그에게 준다.

김정은 조광조와 운명을 같이했던 대표적 사림이었다. 성리학을 신봉했던 신념에도 불구하고 유배 중에 불교사찰을 위해 중수권문을 작성한 것을 보면, 그 사상적 포용력이 남달리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중수권문은 1521년 충암 김정이 사약을 먹고 사사되기 직전에 쓴 것이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수정사는 원제국 시대에 지어진 3대 사찰 (원당사, 법화사, 수정사) 중 최후까지 남아 있었으며, 1521년 경 한차례 중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창된 수정사는 이후 100년도 못되어 거의 황폐해졌다. 어사 김상헌이 1601년 이 일대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을 요량으로 수정사에 들렀다가 남긴 기록에는, "초가 두어 칸이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국가지도이념으로 자리 잡자, 수정사도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 불교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려했던 수정사는 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교회 들어서>

수정사터는 지금의 외도초등학교 서쪽 울타리를 따라 남쪽으로 약 200m 지점으로 지금의 성지교회와 그옆 놀이터 주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 수정사지가 자리 잡은 외도동의 택지 개발 계획이 본격화되면서 당시 수정사의 사역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 개설 계획이 세워졌다. 그런 사업이 시행되기에 앞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문화재의 존재 여부에 따라 도로의 개설 및 우회도로 개설을 결정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정사지 발굴 조사에서 건물지 12동이 발견되고, 도로와 보도·탑지·석등지·담장지 등이 확인되어 수정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유물로는 9~10세기의 해무리굽 순청자가 발굴되어 수정사의 창건 연대를 짐작하케 한다.

18세기 중엽의 백자류까지 출토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만호(万戶) 명문기와 연판문 막새가 출토되는 등 최상급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수정사지에서 발굴된 청석 다층 석탑의 면석에 음각된 인왕상은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어 고려시대 수정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도로 개설 사업이 강행되는 바람에 수정사지에는 절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고, 현재는 도로 주변에 수정사지 터였음을 알려주는 안내판만이 있을 뿐이다.

그 자리에는 성지교회라는 간판으로 교회가 세워져 주변의 아파트를 배경으로 날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옛 수정사지터 남쪽(절물마을회관옆)에는 수정사라는 일반주택 절이 있지만 내용이나 규모에서 옛 수정사와는 거리가 멀고(옛 수정사를 잇는 절이라고는 하지만) 마당에는 옛 수정사지 유물인 칠성각․산신각의 거대한 주춧돌들과 대웅전의 문지도리 등으로 여겨지는 10여점의 석재가 있다.

옛 수정지터에서 200여m 동쪽 도근천옆에는 예전에 음용수로 사용했을 용천수가 있고 거기에는 하나의 비석에 수정천 친축기념비라고 쓰여 있는데 옛수정사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만 하고 있으며 건립연대나 내용은 없고 절터에서 나온 기단들이 길옆에 나란히 있다.

또한 옛 수정사지 남쪽에는 절물이라는 시원한 용천수가 나와 무더운 여름에는 주민들이 이곳에서 더위를 이기기 위해 물맞이 장소로 이용하고 하는데 수정사지 주변에 이러한 절물이나 수정천같은 용천수가 있는 것은 수정사의 규모와 위상을 말해주는 간접적인 증거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불과 400여년 전까지만해도 북쪽의 제주해협을 마주하고 웅장하고도 당당하게 서 있었을 수정사를 상상해보면 그 모습이 보기좋았을 것같다.

하지만 어찌하랴, 달도 차면 기울고 화무도 십일흥이라고 이제는 기울어 그 흔적만을 겨우 찾을수 있으니 그 세월을 탓할 수밖에...

<도근천은 월대와 도근포로 통한다>

수정사터 가까운 곳에는 500여 년 된 소나무의 가지가 푸른 물과 어우러져 동양화 속의 도원을 연상케하는 하천이 있다.

과거 주민들은 이 하천 일대에서 오래된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천에 비친 달빛을 사모하였다하여 '달을 감상하는 곳'이란 의미로 월대(月臺)를 만들었다.

월대 옆을 흐르는 하천은 도근천의 하류에 해당한다. 이 하천에는 은어가 서식하고 있고, 먹이를 찾아 두루미가 날아온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장면에 효과 음향을 더하듯 물이 정겨운 소리를 내며 흐른다.

도근천이 월대를 지나 바다에 이르는 지점에 포구가 있는데, 이 포구를 과거에는 도근포(都近浦)라 하였다. 이와 관련한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제주목에서 서쪽으로 18리에 도근천이 있다. 일명 수정천 또는 조공천이라고 한다. 지방사람들의 말이 매끄럽지가 못한데, 도근(都近)은 곧 조공(朝貢)이란 말의 그릇된 표현이다. 언덕은 높고 험하여 폭포가 수십 척을 날아 흘러 그 밑에서 땅 속으로 스며들어 7, 8리에 이르러 돌 사이로 솟아 나와 드디어 대천의 하류를 이루었는데, 도근포라 일컫는다.

1270년 고려 관군을 격파하고 탐라는 물론이고 남해안 해상교통로를 장악한 삼별초군은 도근천 하류에 있는 포구를 통해 항파두리성으로 보급물자를 들여왔다.

도근포는 삼별초군이 사용하던 조공포가 변형된 이름이고, 그 도근포로 이어지는 하천이 도근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