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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한반도의 첫봄 대평리로 옵서

산방산 보물1호는 산방굴사가 아니...

by 여랑 2011. 6. 17.

우리는 3시간동안의 대정향교와 단산의 답사를 뒤로하고 산방산으로 길을 돌렸다.

암릉으로 둘러싸여 산 전체가 바위로 이뤄진 산방산은 표고가 395m, 비고는 340m인 도내 기생화산중 최고를 자랑한다.

산방산과 관련해서는 전설이 전하는데 옛날 한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다 잘못하여 옥황상제의 옆구리를 건드리고 말았다.

이에 크게 노한 옥황상제는 정상의 암봉(岩峰)을 뽑아 던졌는데 그 자리에 생긴 것이 백록담이고 그 암봉이 날아와 꽂힌 것이 이 산방산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방사성 원소를 이용한 암석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산방산은 약 75만년, 백록담은 2만5천년으로 나타나 산방산이 훨씬 오래전에 융기된 것으로 조사됐다.

산방산에는 서남쪽 절벽 중턱에 영주십경중의 하나인 길이 10m, 너비 5m, 높이 5m의 굴속에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는 산방굴사(山房窟寺)가 있다.

이 산방굴사는 고려말 고승인 혜일법사(慧日法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곳은 애잔한 전설이 있어 또다른 이야기거리를 제공한다.

산방굴 안에는 천장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떨어져 바닥에는 낙수샘을 이루는데 이 낙숫물은 여신(女神) 산방덕(山房德)의 눈물이라고 전한다.

여신으로 태어난 산방덕은 인간세계에 오기를 갈망하여 옥황상제가 처녀로 변신시켜 하계에 내려와 지내던중 고승이라는 남자를 연모해 혼인해서 살았다.

하지만 산방덕의 미모를 탐낸 관아 수령이 남편 고승을 누명씌워 귀양보내 버리고 산방덕이를 차지하려 하자 이를 눈치챈 산방덕이는 산방굴사로 들어가 바다를 바라보며 바위가 돼버렸다고 한다.

산방굴사는 관광객들에게 많이 알려져 지금은 공식적인 관광코스로 들르는 곳이지만 이곳의진면목은 석굴안에 있는 부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돌아서서 태평양을 바라보는 정경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석양무렵의 펼쳐지는 풍광은 가히 모든 사람들에게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황금색으로 출렁대는 물결위로 형제섬과 가파도가 펼쳐지고 아스라이 저 멀리에는 마라도까지 보이는 풍광은 좁았던 마음을 확 풀어놓는데 충분하다.

1986년쯤 아는 선배중에 성원이리는 형이 여기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는데 가끔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를 먹으러 제주시에서 찾아오곤 했다.

성원이 형은 별로 말이 없고 묵직한 성격이었는데 우리가 찾았을 때마다 형은 막걸리를 마다 않고 선뜻 사주며 산방산의 보물 제1호는 산방굴사나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 봤던 모습하고 지금의 느낌은 다르다. 그것은 25년전이라는 단순한 물리적 시간흐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만큼 인생이 성숙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래서 경험하고 아는 만큼 느끼고 생각한다는 말이 이제 더욱 더 가슴깊이 새록새록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원이 형도 더 이상 산방굴사에 있지 않다. 몇 년전까지만해도 연락이 닿았으나 이제는 소문만 들을 뿐인 것이 아쉽다.

산방굴사 옆으로 보면 마애명이 여럿 볼 수 있다. 지금 바위에 마애명을 새긴다면 자연훼손이니 환경훼손이다 하여 뭍매를 맞겠지만 과거에는 자연을 벗삼아서 즐긴 선인들의 풍류로 치부될 수 있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낄뿐이다.

먼저 시인 박정행의 두 아들과 함께 이곳에 들렀다 지은 시를 새겨놓은 마애명이 있다.


烟火紅塵遠(연화홍진원) 風光石室空(풍광석실공)

超然登羽化(초연등우화) 忘却在秋中(망각재추중)

金陵客(금릉객) 朴正行(박정행) 次吟(차음)

子彦淳 ○淳


<연대의 봉화불은 티끌같은 세상일처럼 멀고

빈 석실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경치여

초연히 신선이 되어 날아오르는 듯하니

가을이 왔음도 잊고 말았네>


이 마애명은 시인의 이름과 함께 금릉객(金陵客)이라고 밝혀놓고 있는데 금릉은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의 별호다.

지금은 목포나 완도가 제주 바다길목으로 통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병영이 있던 강진이나 해남으로의 출입이 잦았다.

박정행은 두아들과 함께 강진으로 들어와 이곳에 머물다 시를 새겨놓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석실이 단단하지 못한면도 있지만 각흔이 전문가의 솜씨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옆에는 도내에 여럿 있는 마애명중 유일하게 현감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명이 있는데 대정현감 원상요가 지은 시도 볼 수 있으며 순조 7년(1807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동왕 9년에 떠난 목사 한정운의 마애명도 새겨져 있다.


次壁上韻(차벽상운)

衰草山門寂(쇠초산문적) 蒼林石室空(창림석실공)

似聞笙鶴響(사문생학향) 來自海雲中(래자해운중)

丁卯(정묘) 牧使(목사) 韓鼎運(한정운)


또한 영조의 탕평책으로 등용된 대신들의 무능을 비판하다가 제주에 유배돼 창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유배가 풀리자 섬안의 명승지를 거의 둘러보고 떠난 임관주의 마애명도 보인다.


石作神仙窟(석작신선굴) 方山漏適空(방산루적공)

南天蒼海州(남천창해주) 吳楚一望中(오초일망중)

任觀周(임관주)


<돌이 신선의 굴을 만들어

방산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비인 곳

남쪽 지방 푸른 바다 고을에서

오초(중국 남쪽지방)의 땅을 바라보는 중일세>


시인 임관주의 마애명은 이곳외에도 백록담을 비롯해 창천, 용연 등에도 보이는데 용연의 마애명은 제주를 떠나기 직전에 들른 것처럼 여겨진다.


白鹿潭流水(백록담유수) 爲淵大海尋(위연대해심)

兩崖皆翠壁(양애취졸벽) 歸客片丹尋(귀객편단심)

丁亥(정해) 任觀周(임관주)


<백록담 물이 흘러

넓은 바닷가에 이르러 깊은 못이 되었네

양쪽 벼랑은 모두 푸르른 절벽인데

돌아갈 나그네 조각배 찾는구나>


연구가들에 의하면 산방굴사 마애명중 한정운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한정운이 제주목사로 재임하던 때가 1807년부터 1809년까지이고 그의 산방굴사 마애명에 새겨있는 명기가 정묘년(1807년)임을 감안할 때 영조때 유배왔으며 용연의 그의 마애명에 정해년(1767년으로 추정됨)이라는 명기가 있는 임관주의 마애명이 가장 오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산방산 중턱에 있는 굴사

산방산 주변에는 이러한 마애명외에도 용머리 전설, 금장지(禁葬地)이야기, 광정당(廣靜堂) 이무기 전설, 혜일법사․방철(房哲)스님 이야기 등이 있어 답사객들에게 더욱 풍요로움을 제공한다.


안덕면 감산리 마을복지회관 경내에는 이 고장에 유배와 생활했던 서재 임징하의 유허비가 갓돌위에 145cm높이로 세워져 있다.

서재 임징하는 숙종-영조(1686-1730) 때의 인물로서 1713년 27세에 사마양시 갑오 문과에 합격하였다. 노론이 집권하자 掌令으로 등용되어 6개조의 상소문을 올려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며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순안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대정현 감산리로 위리안치 되었고 1728년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연행돼 투옥된 뒤 고문을 받다가 1730년 7월 44살의 일기로 옥사하였다.

임징하는 제주에 유배왔지만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숙종때 제주목사를 지내면서 선정관으로 칭송을 받았던 임홍망의 손자여서 존경과 대우를 받는데, 임징하는 또한 숙종때 제주에 유배왔던 김진구의 사위이며 10년전 이곳 대정현에 유배됐던 김춘택의 매제이기도 하다.


임징하는 제주에 귀양와서는 감산리 고제영(高濟英) 댁에 적거하면서 인근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글을 쓰곤 하였다.


사후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의 죄는 면해졌고 1809년(순조 9) 이조참판에 특증되었다. 서재 의 5대손인 임헌대(任憲大)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을 당시인 1862년(서재 사망후 132년)에 5대 종손인 임헌매가 비문을 짓고 임헌대가 비기를 써서 건립한 비이다.

임징하처럼 제주와 각별한 인연도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조부와 5대손은 제주목사로 부임했었고 장인 김진구는 숙종때 중전민씨의 폐위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제주에 귀양왔었으며(1689년) 처남 김춘택과 본인까지 이곳에 적거했다.

그후 한양으로 압송될때 그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제주에서 교류하던 지인들에게 시를 남겼다.

讀聖賢書所學何事  성현의 책을 읽어 배우는 게 무엇이랴?

要使此心俯仰無愧  이 마음으로 하여 천지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로다.

從古以來人誰不死  옛부터 어느 누가 죽지 않았으리오마는

橘林在傍百世可侯  귤림이 곁에 있으니 백세를 기다려 보세.

嗟 小子母以我戒  아아, 제자들이여. 나를 계감으로 삼지 말고

閉門讀書益勤無怠  문 걸어 독서에 더욱 부지런히 게으름 없게 하라.(제주통사 147쪽)

처음에는 속칭 '묵은터'인 임징하 적거지[당시 집주인은 고재영] 앞에 세워졌는데, 이후 감산리 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300m쯤 돌아들어간 감산중로 23-8번지 개인 집 입구로 옮겨지고, 1997년에는 다시 안덕계곡 매표소 앞으로 옮겨졌다가 2004년 현 위치인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 감산리복지회관 경내로 옮겨지는 등 많은 곡절을 겪었다.

제주에는 조선시대에 재임했던 목사나 판관들의 은혜를 기려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 학문진흥에 힘쓴 공을 기린 흥학비(興學碑), 제주에 온 유배인들의 자취를 기린 유허비(遺墟碑)등이 곳곳에 남겨져 있다.

그러나 이들 비들은 도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 당국의 관리 소홀, 각종 개발 정책에 밀려 제자리를 이탈해 엉뚱한 곳으로 옮겨지고 있다.

일례로 조선 순조때 제주목사를 지낸 한응호(韓應浩)의 비. 한응호는 제주목사로 재임하는 동안 제주에 남․서학당을 세워 학문을 진흥하고, 기민을 구제한 선정관이었다.

그를 기린 비는 상가리의 흥학비를 비롯, 제주시종합경기장 거사대(去思臺), 아라동 오등에 '건학비(建學碑)'가 있다. 상가리의 흥학비외에 나머지는 제자리를 찾지못한채 이리저리 나뒹굴다 종합경기장과 아라동 오등에 옮겨져 있다.

이 가운데 하나인 종합경기장의 '사상(使相) 한공(韓公)거사대'는 통상 목사의 선정비들이 관아입구나 도로변 동헌에 세워졌던 것이 관례인걸 보면, 현재 위치는 분명히 원래 자리가 아닌 것이다.

또 제주시 오등에 있던 남학당 건학비는 학당터에서 인근 도로변에 나와있다. 그 비석은 반쪽으로 파손돼 '응호 건학비'라는 이름만 겨우 판독할 정도다.

이밖에 우암 송시열 적려비는 원래 제주시 칠성로에 있었는데 오현단으로, 서귀포시 하원동의 왕자추정묘의 문인석은 자연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이처럼 선현들의 사적지(事蹟地)에 세워졌던 각종 비(碑)들이 제멋대로 이전됨으로써 사료로서 가치를 훼손당하거나 상실하고 있음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