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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해뜨는 곳에서 부르는 찬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의 보물 성산일출봉

by 여랑 2011. 10. 19.

토끼섬이 있는 구좌읍 하도리에서 종달리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뛰어난 바다조망을 보여준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굽이치며 가는 해안도로는 오른쪽으로는 오름과 한라산을 왼쪽으로는 확트인 태평양을 배경으로 잔잔히 물결치는 바다는 더없이 평화롭기만 한다.

10분여를 가니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물결위로 갈대가 너울대는 하도철새도래지가 평온하게 눈에 펼쳐진다.

매년 늦가을이 되면 북쪽 시베리아에서 번식을 마친 도요새류.물떼새류.백로류.가마우지류.갈매기류.황새.저어새.수리.매 등 수많은 새들이 제주로 날아와 이곳에서 겨울을 난다.

    창흥동 철재도래지와 바다 사이에 있는 방조제(사진 위)와 그 방조제 아래에 있는 하도해수욕장.

# 뛰어난 조망 보여주는 세화~종달 해안도로

간혹 희귀조류인 저어새 장가리물떼새 등도 오는데 제주지역에서 관찰되는 30여종의 천연기념물 중 거의 대부분의 새들이 이곳에서 관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야말로 살아있는 자연박물관이자 새들의 천국이다.

갈대숲으로 둘러 쌓인 호수 위에서 수만마리의 각종 철새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간혹 볼수가 있는데 장관을 이룬다.

이곳 철새도래지는 최근 농업기반공사가 이곳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매각해 물의를 일으켜 비난을 사기도 했다.

철새도래지 하류에 있는 100여m의 다리를 건너다 보면 왼쪽으로 하도해수욕장이 드넓게 펼쳐지는데 백사장이 넓고 완만해 가족들이 오기에 안성맞춤이다.

듬성듬성 사람들이 모습이 보이는데 조개를 잡는지 모래를 파는 이들도 있고 저마다 부서지는 햇살아래 행복한 모습들이다.

                                  구좌읍 하도리~종달리 해안도로에서 조망되는 우도

우리는 우도전망대가 있는 해안도로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차를 세웠다. 언제나 그렇지만 답사의 하루일과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중 한때이다. 점심보자기를 풀고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한입먹으니 구수한 옛날맛이 느껴진다. 한 회원이 잠시 일어서더니 해산물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에게서 낙지 한 접시를 사왔다.

소주한잔에 낙지 한 가닥, 크~ 정말 죽여주는 맛이다. 남도의 세발낙지에 소주맛도 괜잖지만 이도 그에 못지않다. 점심을 먹고 바람막이 바위를 골라 소담소담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 정겹다. 이렇게 나지막한 행복을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그 또한 남부럽지 않을 텐데….

                                             봄이면 수채화를 뿌려놓은듯한 우도

잠시후 우도전망대에 올라 손을 뻗으면 잡힐듯한 우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닷가에 고깃배 한척이 한가롭게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넉넉한 시간동안 앉아서 점심을 먹은후 식산봉을 향해 차를 몰았다. 북군의 최동단인 종달리를 넘어서니 멀리서부터 수목으로 어우러져 있는 식산봉이 언뜻언뜻 보인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달리기를 20여분, 우리는 식산봉 코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양어장들 사이를 가르는 돌뚝을 따라 식산봉으로 가려는데 양어장 한구석에 조그만 뗏목같기도 한 것이 눈에 띄었다. 대나무로 엮어 그 밑에 스티로폴을 이용하여 물위에 뜨게 한 것인데 양어장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 같았다.

# 계획에도 없던 양어장 뱃놀이에 '혼쭐'

누군가가 '한번 타보자'라는 제안에 모두들 머뭇머뭇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데 처음 말한 회원이 내려가 묶어놓은 줄을 풀고 어서 타라고 한다.'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모두들 몰려갔다.

                                                   구좌읍 하도리 창흥동 철새도래지

노를 대용하는 왕대를 가지고 뗏목을 움직여 양어장 가운데로 나아갔다. 모두들 신기해서 얼굴들을 쳐다본다. 과연 그곳에는 양어장답게 많은 물고기들이 있었다. 우리는 양어장을 이리저리 누비고다니며 계획에도 없던 뱃놀이를 즐겼다.

그런데 이게 웬 욕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동쪽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것을 막아놓은 뚝위에서 50은 넘겼을 것같은 사람이 손짓을 하며 뭐라고 하는데 거리가 멀어 정확하게 듣지를 못했다.

'별 이상한 사람도 다있네하며 계속 뱃놀이에 열중하기를 5분여, 그 사람이 더욱 악을 쓰면서 빨리나오라는 듯한 손짓을 해댄다.

                            식산봉옆 양어장들

우리는 천천히 뗏목을 바위쪽으로 향하고 그 사람은 그 곳으로 뛰어왔다. 뗏목에서 내리자마자 험악한 욕이 우리들 앞에 쏟아진다.

"어느 동네 놈들이냐. 못생긴 놈의 자식들. 정신이 있어 없어”. 마치 그 사람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마구 내뱉는다. 멀리서 볼때는 고등학생들이려니 생각했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다 큰 성인들이라 더욱 기가 막혔던 모양이다.


세상이 이런 쪽팔림이라니,“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서둘러 차에 올랐다. 아이고 식산봉은 보지도 못하고 떠나는구나. 우리는 그렇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큰 망신살을 뻗치고….하지만 창피한 것은 창피한 것이고 식산봉에 대한 소개는 하고 넘어가야 겠다.

# 많은 전설을 간직한 식산봉


식산봉은 오조리 해안가에 위치해 있는 오름으로 오조리양식장과 맞닿아 있다. 식산봉은 대나무와 그밖의 다른 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럴듯한 전설이 있다.

                            식산봉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오조리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는데 어느날 왜구의 잦은 출몰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꾀를 내어노람지를 엮어 식산봉 전체를 덮었는데 먼바다에서 나타난 왜구들이 이것을 보고 군량미로 오판하여 저 정도의 군량미이면 군사의 수가 대단히 많을 것이다하여 물러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식산봉은군량미를 쌓아둔 산이라는 유래를 갖고 있다고 한다.

                         식산봉내 숲

또한 식산봉은 그 형상을 옥녀발산형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오조리에 대장장이 아들과 양반신분인 처녀(옥녀)가 서로 사랑을 하였는데 신분상의 차이로 혼인을 못하고 서로 은밀한 언약만 맺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의 세도가가 우연히 그 처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으나 이 처녀가 대장장이 아들과 좋아하는 사이임을 알고 시기해 그를 죽이고 바닷가에 버렸다. 그후 처녀가 세도가의 수청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메다가 바닷가에서 숨진 시체를 발견하고 울다 몸이 굳어 버렸다.


처녀의 굳은 몸은 식산봉이 되고 총각의 몸은 맞은편 장시머들 언덕으로 총각의 시체를 담으려던 관은 일출봉으로 변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 전설속에 담으려했던 메시지는 무엇었을까를 생각하며 눈을 감는다. 언뜻 떠오르지가 않는다.


우리는 식산봉을 발앞에 두고 눈으로만 보고 와야하는 안타까움을 안은채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야 일출봉으로 향했다.

 

성산일출봉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오조리 성산수고 입구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들어가는 길과 성산읍의 중심지인 고성리로 들어가서 초등학교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고성리를 통해서 들어가는 길밖에 없었지만 오조리와 성산리를 잇는 갑문이 개설되면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

                 성산포로 들어가는데 놓여있는 성산갑문.

그중에서 나는 성산수고 앞으로 해서 갑문을 지나 성산포로 들어가는 길을 좋아한다. 거리도 가까울뿐만 아니라 읍내 중심가로 들어가는 번잡함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산수고를 지날때부터 펼쳐지는 옆의 식산봉을 비롯해 서쪽으로 바다 정취가 시원스럽게 펼쳐진 풍경만큼이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성산일출봉, 영주10경중에서도 이곳에서 일출을 보는 것을 그중 제일로 치는 곳으로 성산포 동남쪽 바닷가에 돌출된 바위 분화구이다.


지금은 너무나 잘 알려진 관광지가 돼 있는 일출봉은 동·남·북면 모두가 깍아지른 절벽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서쪽만이 고운 잔디능선이 깔려 있고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개설돼 있다.


성산일출봉은 약 10만년전에 대정향교뒤에 있는 단산처럼 바다속에서 수중폭발한 화산체로 뜨거운 용암이 물과 섞일 때 일어나는 폭발로 용암이 고운 화산재로 부서져 분화구 둘레에 원뿔형으로 쌓여 있는 형태이다.

                              하늘에서 본 성산일출봉

따라서 일출봉을 이루는 암석도 도내 거의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현무암과는 다른 응회암으로 푸른 빛이 감도는 치밀하고 고운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에 운반되어 퇴적된 퇴적암처럼 보이지만 퇴적암이 아니라 화산 활동에 의하여 생성된 암석이다.


온도가 1000도가 넘는 용암이 지표로 나오다가 갑자기 물을 만나면 폭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폭발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현무암질 용암도 분출도중 물을 만나면 폭발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용암이 모래(화산재)처럼 부서져 분화구 주위에 쌓이게 된다.

                           광치기 해안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수중폭발화산의 폭발력은 용암과 물의 비가 1:1 정도일 때 가장 크다. 이 경우 화산재는 점성이 크지 않아 분화구 둘레로 넓게 흘러 나가 거의 수평에 가까운 층리를 이루며 쌓인다.


이렇게 생긴 것을 응회환이라고 하며 송악산 하부·수월봉·산방산 앞 용머리 해안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물의
비율이 더 많을 경우 폭발력은 줄지만 폭발로 부서진 용암 조각이나 가루·화산재 등의 점성이 높아져서 원뿔처럼 경사가 급한 화산체인 응회구를 이룬다.

일출봉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만들어진 응회구이다. 서북사면을 제외한 모든 곳이 절벽이 된 것은 파도에 의한 침식 때문이다.


등산로 중간쯤에는 길목에 비껴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등경돌이라는 바위로 제주섬을 만들었다는 여신(女神) 설문대할망이 바느질을 위해 불을 밝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등산로를 따라 해발 182m의 정상에 오르면 거대한 접시모양의 분화구가 있으며 분화구 둘레를 따라 99개의 기암괴석이 봉우리를 빙둘러 있다.


그래서 일출봉을 멀리서 바라보면 고대의 성곽처럼 보이기도 하며 커다란 왕관모습이라고도 하고 커다란 코끼리가 서 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등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정상은 지름 600m, 깊이 90m 8만평이나 되는 널따란 면적의 분화구가 평온하고도 아늑하게 펼쳐지는데 가을날 소슬바람이 불 때 군락을 이뤄 너울대는 억새꽃의 물결은 장관을 이룬다.


일출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관 또한 일출봉에 뒤지지 않는데 우도를 조망하는 전경은 지미봉에서 바라보는 맛과 새로움을 준다.


또한 봄에 바라보면 섭지코지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와 함께 테역밭에 방목된 말이 풀을 뜯고 노오란 물결로 출렁이는 유채꽃 들판이 가물가물 어우리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토속적 정취를 물씬 풍기게 한다.


하지만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라는 노랫말처럼 일출봉의 빼어난 극치는 뭐니뭐니해도 일출을 보는 경관일 것이다.


아침 일찍 정상에 올라 희미한 새벽 하늘을 뚫고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힘차게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광경이야말로 외경심을 느끼게 한다.


최근에는 해마다 11일 성산일출제가 열려 많은 도민들과 관광객들이 새해 첫 일출을 보기위해 일출봉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 세계적 보물에 서려있는 아픈 일제의 흔적

성산일출봉에는 이렇게 찾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도 하지만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3년 일본군이 일출봉 아래 절벽에 주민들을 동원, 24개의 동굴을 파놓은 흔적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도 볼 수 있다.

              일출봉 밑에 있는 일제의 잔재

일본군은 기울어진 전세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알고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한 작전으로자결7호 작전을 수립하는데 이것은 제주도를 거점으로 하는 옥쇄작전이었다.

, 미군 함정이 해안에 나타나면 자폭용 어뢰정을 발진하여 상륙을 저지하고, 상륙한 적은 해안선 가까이에 있는 오름에 굴을 파서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며, 마지막에는 한라산 중턱까지 쫓겨가면서라도 항복하지 않고 제주도민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끝까지 게릴라식 저항을 계속함으로써 비행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높이 35m, 넓이 3m, 길이 1050m 정도로 파놓았는데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미군의 상륙에 대항하기 위한 자폭용 소형 어뢰정을 숨겨 놓았던 곳이다.

그 중 서쪽에서 첫째굴과 둘째 굴은 입구를 시멘트로 보강하였으나 나머지 굴들은 굴착한 그대로이다. 셋째번 굴은 넷째번 굴과 안쪽에서 연결되었으며, 다른 굴들은 깊이 15m 정도의 직선 형태로 거의 같다.


여섯째 굴에는 누군가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드렸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전쟁의 목적으로 파놓은 굴을 가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의 장소로 전용하고 있음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성산포에서 신양 앞바다 쪽으로 일본군이 통신연락용으로 바다 밑에 매설한 약 1000m 정도의 구리선을 발굴하겠다며 허가 신청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 따른 해저촬영사진을 제시했다. 이 구리선은 아마도 어뢰정 기지와 고사포 진지간의 연락용이 아니었나 추정하게 한다.


어쨌든 일제는 본토 사수를 위해 굴속에 폭탄과 어뢰들을 가득 실은 쾌속정까지 감춰놓고 마지막 일전에 대비했지만 다행히 제대로 사용을 못해보고 패전하고 만다.


이러한 흔적들은 도내 해안선을 따라서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별도봉이나 송악산, 서우봉 등에도 구멍이 뻥뻥 뚫려 패전을 앞두고 저지른 일제의 행위를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