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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해뜨는 곳에서 부르는 찬가

토끼섬에 토끼는 없고 문주란이 있다.

by 여랑 2011. 10. 19.

동원터가 있는 조천읍 와산리를 출발한 차는 일주도로로 내려가기 위해 선흘과 덕천을 넘어 한동으로 내달린다.

지금의 구좌읍 한동리는 옛이름이이고 한자로는 괴이리(槐伊里)로 쓰기도 했다. 한동리는 예전에는 도내에서도 전통있고 뼈대있는 유림 마을중 하나이고 동쪽에 있는 마을중 조천, 신촌 등과 함께 명망있는 인사들을 배출해낸 고을인데 이 마을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 도채비불과 한동리 지명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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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년전 이상하게도 이 마을에는 도채비불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도깨비를 제주에서는 도채비로 불린다.

                                                               한동리 전경

이 도채비불은 밤마다 해안쪽에서 날아와 처마에 붙어 순식간에 집으로 올라 붙었고 이런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어서 온 동네가 전부 도채비불에 희생될 것같아서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여앉아 의논한 결과 매일밤 순번을 정해 불침번을 서서 지키기로 했다. 불침번을 서는 사람들은 당번을 서다보면 도채비불이 바다쪽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동네로 올라오더니 이집저집에 달라붙는 것이었다.


당번들은 이때마다 소리쳐서 사람들을 깨우고 불을 껐는데 불을 꺼서 보면 어기에는 불붙은 말똥이 남아 있곤 했다.


그래서 도채비불은 말똥에 붙은 불이 그 불씨임을 알았지만 그 이상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밤마다 잠을 못이루고 당번들은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도채비불을 내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마후 이 사실은 관가에 까지 알려졌고 관아에서는 이 사실을 조사하려고 목사가 직접 행차하여 밤을 새우며 조사를 시작했는데 마을에 발생하는 불은 도채비불이 아니라 인화(人火)가 분명하니 그 범인을 색출해 내라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웃동네에 사는 사람이 나타나서마을의 화재는 도채비불이 틀립없다고 간언하고 나섰다
.


목사는 이 사람이 수상하다고 여기고 상투를 풀고 말꼬리에 묶으라고 호통치면서 이렇게 해서 성안까지 끌고 가겠다고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당황했다. 도채불로 인해 애꿎은 사람이 죽어나게 생겼으니 그도그럴만 했다.

이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중 하나가 집으로 달려가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치솟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말꼬리에 머리를 묶고 출발하려던 목사 일행도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가 불을 끄는데 정신이 없었다.


목사는 그제야 도채불임을 인정하고 마을 이름이 나빠서 불이 나는 것이니 고치라고 지시하고 돌아갔다.

목사 말에 따르면 수인씨(燧人氏)가 처음 불을 일으킬때 홰나무(愧木)로 불을 일으켰는데 그 괴()자를 쓰기 때문에 불이 난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주변의 학문이 깊은 사람을 찾아 마을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했는데 지금의 한동리(漢東里)라 지었다.

홰나무로 일어난 불을 끄는데는 한수(漢水)를 당겨와야 하니 한()자를 써야하고 동()은 한라산 백록담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니 그 백록담의 물을 당긴다는 의미도 있어 좋다는 것이었다.

마을은 이름을 바꾼 이후에는 도채비불이 없어지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 편협한 아집이나 협소한 자기만족이 아닌 자부심

필자도 한동에서 나고 자란 지기를 알고 있으며 지금도 교우를 해오고 있고 10여년 연배인 선배님을 알고 지내기도 하지만 한동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은연중에 나타난다.


하루는 그 선배님이 물었다.

자네 대한민국 3대 도시가 어디인줄 아나

그거야 당연히 서울, 부산, 대구가 아닙니까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아니 틀렸어, 대한민국 3대 도시는 서울, 부산, 한동이야

이런 자산감이 몇백년을 유림의 마을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온 한동 사람들에게 유전적으로 체화된 자부심이고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한 자부심이 웬일인지, 편협한 아집이나 협소한 자기만족으로 들리지는 않는 것은 무엇일까.

한동리를 넘어선 차는 구좌읍 하도리에서 좌회전하며 꺾어 돌더니 흔들거렸다. 그리고 바닷가쪽으로 5분여를 달리니 태평양의 푸른물결이 가슴까지 출렁거리면서 한눈에 답사팀을 맞이했다.

그리고 해변 바로앞에 몇발자욱 내딛으면 갈 수 있을 것같은 섬이 바다위로 나즈막히 떠있다.'저게 바로 토끼섬'. 바닷내음이 코를 타고 물씬 풍겨오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모두 환호를 터트렸다.

해안도로에 차를 대고 색깔이 너무나 푸른 해변으로 달렸다. 마치 모두가 소풍나온 초등학생들 처럼….그러나 바닷물이 맞닿는 바위까지 다다랐을 때 우리는 너무나 놀랐다. 차안에서 보았던 거리와 이곳에 와서 직접본 토끼섬과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었다.

최소한 200m는 될 듯 싶다. 정말 유행가 가사대로 저바다가 육지라면 금방이라도 뛰어가서 섬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랴 저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우리는 건널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연인들처럼 토끼섬을 바라보았다. 왜 토끼섬이라 했을까.


조금 있으면 썰물이 최고조가 되어 어쩌면 건너갈 수 있을 것이라는 어느 어부의 말을 듣고 뒤돌아서서 보말이나 고동 등 해산물을 잡기 시작했다.

좀더 먼 곳을 보니 해녀들이 수산물을 채취하고 있다. 제주지역 여성들은 과거부터 생활력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데 이는 척박한 토양이란 자연적 환경으로 인해 그만큼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것을 대표하는 것이 지금 저기서 '휘이~' 소리를 내며 바다속에서 소라와 전복을 캐고 있는 해녀들이다.

# 척박한 환경속 제주여인들 물질로 가정경제 지탱....그 고단함이 '숨비소리'

과거 해안마을에서는 열예닐곱이 되면 물질을 시작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바다와 고락을 함께 했다.

감귤과 관광이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으로 자리잡기 전까지 우리네 어머니들은 그렇게 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는데 보조역할을 담당하거나 또는 주역을 맡았다.

해녀들이 해저에서 전복이나 소라 등의 수산물을 채취하고 수면에 올라와서 '휘이~'하고 내쉬는 숨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제주의 해녀들은 그렇게 내쉬는 숨비소리 만큼이나 고단하고 힘든 물질을 이어와야 했다.

제주도의 해녀들은 타지역까지 나가 물질을 하기도 했는데 1895년께 경상남도 지역에 진출한 것이 그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로 들어오면 제주해녀들의 출가는 한반도 남부 지역뿐만 아니라 원산 등 북부 지역, 일본, 따렌(大連), 칭다오(靑島), 블라디보스톡까지 넓어져 갔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했던 제주해녀

해녀들은 매년 4월경에 출가하여 9월까지 활동을 했는데 해녀가 많이 분포한 구좌․성산지역의 경우 해녀의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이나 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해녀들이 최근 들어서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다. 이제는 20대 해녀는 찾아볼 수도 없거니와 지금 물질하고 있는 해녀들도 모두 고령화돼서 이제 20여년 후에는 제주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자녀들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그래서 그 고되고 힘든 물질을 대물림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탓할 수는 없지 않는가.

덥지도 춥지도 않은 4월의 조용하고 한가로운 봄날, 썰물로 바닥을 드러낸 해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잡거나 채취하는지 열심이다.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우리는 썰물이 생각보다 늦어지자 일정을 감안, 토끼섬과 최단거리를 두고 있는 해변에 모여서 건널 것인가 말 것인가를 의논했다. 결론은 '가지말자'.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랴, 한 회원이 바지를 걷어붙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두회원이 뒤를 따랐다. 조심조심 한발짝 한발짝씩 전진하는데 깊이가 더욱더 깊어진다. 물이 허리까지 올라왔다.

세명은 20여분을 걸어 토끼섬에 도착했다. 오지 않은 두 회원이 우리가 떠난 그 위치에서 손을 흔든다. 토끼섬에 오르자마자 시원한 바다바람이 불어왔다.

# '난여여'로도 불리는 토끼섬에 문주란만 가득

토끼섬, 한여름 하얀 문주란꽃이 온섬을 뒤덮을때 그 모양이 토끼같아서 붙여진 이름. 토끼섬은 원래 바깥쪽에 있는 작은 섬이라는 뜻으로 '난여여'로도 불린다. 960여평의 면적에 백사장과 10여m의 혐무암 동산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섬안으로 들어서자 아프리카 남단에서 파도를 타고 온 씨앗이 뿌리를 내렸을지도 모른다는 문주란이 섬가득 자라고 있었다.

                                                   토끼섬에 자생하고 있는 문주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자생지인 토끼섬에서 문자란은 겨울이 지내고 봄을 맞으며 파랗게 새순을 내어 7월말쯤이면 백설같은 꽃을 연달아 피워 9월까지 온섬을 하얗게 물들이는데 지금은 4월이라 연두색 잎들만 몇 개씩 나와 있다.

우리는 토끼섬 꼭대기에 서서 태평양 바다바람과 섬을 유심하게 둘러보았다. 그 문주란 군락속 가운데에 동자석같은 큰 돌이 세워져 있어 다가가 천천히 바라보았다. 동자석은 아니고 기다란 돌을 세워놓은 것이었다.

누가 무슨이유로 이것을 여기 만들었을까. 섬에 살면서 다시 작은 섬으로 들어온 기분이 묘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1시간여의 답사를 끝내고 뒤돌아 나왔다. 가지않은 회원들이 어땠었냐며 호들갑스럽게 물어보는데 한마디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 있는 힘껏 웃어제치며 우리는 다음코스로 차를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