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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천리를 돌아왔던 유배의 땅

유배객들, 그들에게 제주는?

by 여랑 2011. 4. 30.

제주시내에는 광해군 말고도 걸죽한 유배인들의 적허지가 있다. 그중 귤림서원, 지금은 오현단에 모셔진 오현(五賢)중 처음으로 배향된 충암 김정은 제주읍성 동문 밖 금강사지(金剛寺址․지금의 동문시장 남쪽 남수교 인근)가 그의 적거지였다.

충암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중종 때에 조광조와 더불어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과 함께 탄핵당해 사약을 받을 누란지계의 위기에서 정광필의 노력으로 목숨을 건져 처음에는 금산(錦山)으로 유배됐다 뒤에 제주로 오게 되는 인물이다.

충암 김정은 중종 15년(1520) 8월에 제주목으로 유배당하는데 이듬해인 중종 16년(1521)에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사망한다.

그는 제주 유배 기간에 제주향교 교수 김양필, 유생 문세걸 등 제주 유생들과 교류하였고 제주에 있으면서 '한라산기우제문', '수정사중수권문'을 지어 제주도민의 교화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적거지 주변에 우물을 파서 그 물을 직접 이용하였다.

 

그가 조카에게 제주의 풍물을 적어보내 '제주풍토록'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중종 17년(1522)에 충주로 옮겨졌으며, 인종 원년(1545)에 복권되어 인조 24년(1646)에는 영의정에 추증된다. 선조 11년(1578)에 조인후 제주판관에 의해 충암묘(庶庵廟)가 건립돼 지금의 오현단의 시발이 되는 귤림서원 탄생의 주춧돌이 된다.

                                               송시열 적거지로 추정되는 칠성로 골목

 

이외에 숙종때 성리학의 큰 인물이며 노론의 최고지도자였던 우암 송시열은 그의 나이 83세이던 1689년에 제주에 유배와 100여일 동안 지금의 칠성로 뒷골목(제주기상청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는 설도 있음)에 있는 윤계득의 집을 빌려 적소로 썼다. 그의 유허비는 오현단에 있다.

 

# 19세기 후반되면 제주는유배객들로 몸살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상징인물로 꼽히는 면암 최익현은 1873년 유배와 1875년까지 지금의 중앙로에서 탑동으로 내려가는 중간의 칠성통사거리(중앙로 금강제화 맞은편이라는 설도 있음)에 있었던 윤규환의 집에서 적거생활을 했다.

 

그는 제주유배동안 도내 유림들과 교우했는데 훗날 도내에서 결성된 항일비밀결사체인 집의계의 중심인물인 이응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말의 관료이며 문장가로 온건개혁파의 거두였던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은 1897년 유배와서 지금의 중앙로 사거리 와환은행 자리(칠성통 아주반점 주변이라는 설도 있음)에서 4년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또한 고종의 부마로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실패해 일본으로 도피했던 박영효는 1907년 대신암살음모 사건으로 제주에 유배돼 보덕사(도남 성환아파트 남쪽)가 위치해 있는 속칭 독짓골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910년 6월 돌아간다.

                        최익현의 유배지로 추정되는 중앙로터리 북쪽 칠성통 사거리

 

제주에 유배온 정객들은 제주에서 어떤 생활을 했을까. 물론 이는 같은 유배인들이라도 시대에 따라서 또는 개인 성향에 따라서, 유배기간에 따라서 등으로 많이 나눠질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성향의 유배생활을 했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한말에 유배왔던 김윤식이 남긴 그의 유배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를 살펴보면 유배인들 생활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 유배인 관리 형식적...자유롭게 만나 술도 마시며 적적함 달래

 

1897년 말 김윤식이 제주에 도착했을 때 제주에는 중앙정치의 격변 과정에서 밀려난 정치인 13명이 유배되어 있었다. 이준용(李埈鎔) 모반사건에 연루된 최형순(崔亨順)이 1895년에, 을미사변 당시 방관한 죄로 서주보(徐周輔), 정병조(鄭丙朝), 김경하(金經夏), 이태황(李台璜), 이범주(李範疇), 김윤식(金允植), 이승오(李承五) 등이 1897년에, 다시 친러정권 전복을 위한 쿠데타에 연루된 김낙영(金洛榮), 김사찬(金思燦), 한선회(韓善會), 이용호(李容鎬), 장윤선(張允善) 등이 1898년 제주로 유배되었다.

                                         김윤식의 적거터로 알려진 제주시 일도1동 1108번지 

 

김윤식이 제주에 당도하자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는 곧바로 조정의 명령이라 하여 감옥소에 가두고 시종의 왕래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관의 기강이 서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시늉에 불과하였다. 얼마 안가 감옥에는 읍내 유지들이 드나들었고, 시중들러 함께 따라온 제자 나철(羅喆․1909년 대종교 창시)이 밤새 바둑을 두기도 하였다.

 

# 이들은 언젠가 돌아갈 사람들...줄 대려는 지역유지 발길 '북적'

 

결국 40일만에 김윤식과 이승오는 석방되어 교동 김응빈(金膺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감옥에 같이 있던 나머지 유배인들도 모두 석방되어 김윤식과 가까운 곳에 거처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이 관의 유배인 관리는 형식에 그치는 것이었다. 1901년 초 제주군수로 부임한 김창수(金昌洙)는 첫 임무로서 감옥서의 정리에 나섰다.

 

나름대로 감옥 주위에 가시를 깔아놓아 유배죄인을 엄격히 관리하는 척하였다. 그리고는 서주보, 정병조, 이범주 등 세 유배인을 시범적으로 감옥에 다시 가두었지만, 김윤식과 같은 거물 정치인은 예외였다.

천주교 라크루 신부가 옥문을 허물고 이범주를 데리고 나갈 때에도 관에서는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유배인들은 서로 가까운 데 거처하며 자유롭게 상종하였다. 이들은 밤낮으로 서로 만나 술을 마시고 시도 지으며 섬에 갇힌 적적함을 달랬다. 이들 주위에는 제주도내 여러 유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각종 술과 음식이 그칠 줄 몰랐고, 기생들도 처소에 자주 출입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제주의 여인들을 첩으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기도 하였다.

 

의실(義室), 문랑(文娘), 군자홍(君子紅), 향란(香蘭) 등은 각각 김윤식, 김사찬, 최형순, 서주보의 여인으로 속음청사에 기록되어 있다. 김윤식은 의실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뒤에 그녀는 죽고 자식은 유배지를 옮길 때 함께 제주를 떠났다.

 

# 여인을 두고 유배객 신분을 넘치는 생활도

 

이러한 유배인들의 제주 생활은 권력과 친지들에게서 잠시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 중죄인의 처지에 걸맞지 않는 분에 넘친 것이었다. 

  김윤식이 쓴 속음청사

김윤식은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이 '번화한 서울의 재미와 다를 게 없어 유배인이라는 신분을 돌아볼 때 너무 분에 넘친다'고 할 정도였다.

 

유배인들은 도내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1898년 '방성칠란' 때 최형순과 김낙영은 처음에 민란지도부에 참여하였다가 뒤에 같은 유배인 이용호와 결탁하여 오히려 민란을 진압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당시 민란지도부는 정감록(鄭鑑錄)의 내용에 따라 유배인 정병조를 별국(別國)의 지도자로 추대하려고도 하였다. 김낙영은 민란 직후 남수구(南水口) 성위에서 떨어져 주민들에게 맞아죽는 참변을 당한다. 이는 주민들이 김낙영의 배신에 대해 보복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유배객들 도내 정치적 주요사건에도 관여

 

유배인들은 1899년 제주에 천주교 포교가 시작되자 열강 프랑스와 연결된 천주교회에 관심을 가져 교회를 출입하기도 하였다. 이용호․이범주, 최형순, 장윤선 등은 결국 교회에 입교하여 결국 1901년 '이재수란' 간여하게 된다.

방성칠난때 이중적 태도를 취했던 최형순은 교민들 편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각종 싸움을 주도하다가 5월28일 제주읍성이 열리자마자 이재수의 칼 아래 죽는다.

 

장윤선은 목포로 가서 민란 사실을 서울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고, 이용호와 이범주는 민란 당시 교민들을 이끌다가 읍성문이 열린 뒤 다호리 채구석(蔡龜錫) 대정군수의 거처에 은신하여 목숨을 건진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제주에 유배됐던 모든 이가 이러한 유배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혹은 개인별 성향에 따라 지역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유배인의 신분과 처지에 맞게 생활했던 인물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유배객이 이처럼 그들의 처지를 벗어난 분에 넘치는 생활을 했고 이는 또한 고위 정치유배객을 이용하려는 일부 지역토호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리기도 했다.

유배인들은 언젠가는 중앙으로 올라갈 존재들이어서(사실상 대부분 그렇게 했다) 그들이 제주문화나 제주민들에 대한 이해를 엿본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유배인들에게 제주는 잠시 지나쳐 가는 곳이었고 그들에게 비친 제주민은 한낱 변방의 저급문화를 가진 사람들로 비쳐졌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후 수많은 제주유배객의 영향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접근한 측면이 강하다고 여긴다. 이는 유배문화를 제주문화의 주요 요소로 이해해 버림으로써 자칫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지역문화의 역동성을 무시해 버리는 결과를 낳아버리게 된다.

 

# 유배객 제주영향 긍정적 측면불구 부정적 부분도 적지않아

 

그렇다고 물론 너무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는 것도 올바른 것은 아닐터이다. 비록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분명 지역사회와 문화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시내를 보면 이러한 주요 유배객들의 적거지를 아직 지정하지 않아 찾는데 어려움도 있겠지만 현란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건물의 이면에는 유배객들의 거처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같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광해군 등 제주시내에 머물렀던 주요 유배객의 적거지를 찾는데 여간 어려움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당국이 적거지를 매입하는 등 지정을 하지않은 탓이 가장 크지만 주변에 유배지를 알리는 문화유적 표석을 만들어놓고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 유배지 표석세우고도 활용 소홀 안타까워

 

제주시는 지난 97년부터 시내 유적의 터와 유배왔던 이들의 유허지 등을 나타내는 표석을 제작, 4년동안 85곳에 옛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표석을 설치했지만 표석을 만들어 놓고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는데는 소홀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면암 최익현선생이 살던 터와 오현 가운데 한 분인 우암 송시열선생의 유허지, 충암 김정의 유허지를 표시하는 표석 등이 시내 곳곳에 있다.

 

하지만 관심있는 관광객이나 도민들이 찾아가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유허지 가까이 있는 간선도로 표지판에 이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으면 보다 쉽게 찾아 갈수 있으련만….

충암 김정의 유허지를 알리는 표석만 보더라도 동문시장 남측에 있는 남수교 동쪽과 서쪽 끝에 조그만 표석을 세워 이곳이 김정의 적거지 주변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사실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이 표석을 발견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