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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천리를 돌아왔던 유배의 땅

유배의 인연-홍윤애와 조정철

by 여랑 2011. 4. 30.

서부관광도로를 따라가다 유수암 주유소에서 한라산쪽으로 가다보면 홍윤애의 무덤이 있다. 홍윤애의 무덤에는 하나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지 몇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해서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

이는 홍윤애가 사모했던 조정철이 그녀가 죽고 30여년이 지난후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다.

조정철은 정조시대에 제주로 유배온 정객이었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격한 당쟁의 소용돌이로 인해 희생됐듯이 세손시절부터 위험한 고비를 여러번 넘겨 등극했다.

1777년 제주에 귀양온 조정철도 정조시해음모라는 죄목으로 위리안치됐다. 조정철은 이때 제주에서의 귀양살이를 시작으로 1788년 나주로 옮겨지고 1805년 풀려날때까지 무려 28년간의 유배생활을 이어간 인물이다.

더구나 조정철의 가문은 할아버지대부터 자신까지 3대에 걸쳐 4명이나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진기한 기록이 보이는데 타락할대로 타락한 붕당정치의 폐단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그의 조부 조승빈은 1723년 신임옥사로 정의현에 유배되었으며 작은할아버지가 되는 조관빈은 8년후인 1731년에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그런가하면 그로부터 23년후인 1754년에는 그의 부친 조영순도 영조의 탕평책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된후 다시 23년만에 자신이 제주에 유배와 제주사람 신호의 집에 적거하게 된다.

조정철은 제주에서의 11년 동안의 유배생활동안 홍윤애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둘은 딸까지 낳게 된다.

하지만 둘은 이루지 못할 인연이었던지 1781년 조정철의 집안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던 소론파의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해 오면서 파란을 맞는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죽일 죄목을 찾기 위해 그의 집을 출입하던 홍윤애를 잡아 문초했지만 그녀는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모든 사실을 부인하고 처절하게 숨을 거둔다.

훗날 조정철은 이때의 비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어제 미친 바람이 한 고을을 휩쓸더니
남아 있던 연약한 꽃잎을 산산이 흩날려 버렸네>

이러한 사건이 있은후 조정철은 정의현 김윤재․김응귀의 집으로 적거지를 옮기게 되고 7년후 나주로 이송된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조정철의 행로가 그렇게 끝나버렸다면 홍윤애와의 슬픈 사랑도 잊혀지고 말았을 텐네 조정철이 제주목사로 올 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렇게 나주로 옮겨진 조정철은 1805년까지 유배생활을 하다 풀려난후 1810년 드디어 조정에 나아가게 되고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부임하자마자 딸을 만나고 죽어간 홍윤애의 혼을 달래기 위해 그의 무덤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까지 세운다.

또한 조정철은 제주유배생활동안에 시와 제주의 풍속, 기후 등을 기록한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을 쓰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시는 원지에 부초된 유배인의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잠은 어이 더디고 밤은 왜 이리 길꼬
하늘가 기러기 소리 애간장을 끊네
만사가 이제 텅 비어 백발과 같아
쫓겨난 신하의 눈물 천리를 가네>

                                                  <원래 홍윤애 묘터자리(전농로)>

하지만 이렇게 막막하고 고통스런 유배생활 속에서도 조정철은 홍윤애라는 여인과의 인연이 있어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골이 깊은 만큼 물도 깊다고 했던가.

그런데 원래 홍윤애 묘는 제주시 삼도1동 전농로 불교회관이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1936년 이곳에 제주공립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지금의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