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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천리를 돌아왔던 유배의 땅

추사 김정희-잘 나가던 정객에서 유배객으로

by 여랑 2011. 4. 30.

차는 동광검문소를 지나 저항의 땅, 대정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정지역은 말그대로 저항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래서 볼만한 곳도 유적도 많다. 수많은 정객들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으며 일제의 아시아정복을 위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곳이다.

어디를 먼저 볼까 의논하다가 가까운 인성리에 있는 추사적거지부터 보기로 했다.

추사적거지는 동광검문소를 지나 서쪽으로 9㎞를 더 가다보면 인성리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오른쪽 대정읍성 동문사이로 난 마을길을 따라가면 바로 길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헌종 6년(1840) 윤상도 옥사가 재론되면서 그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 인성리에 유배된 인물이다.

윤상도는 1830년에 호조판서 박종훈 등을 탄핵하다가 군신(君臣)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죄로 추자도에 유배되었었다. 그런데 헌종 6년(1840)에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어 윤상도 등이 다시 조정에서 국문을 받고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국문과정에서 김정희가 부친과 함께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 잘 나가던 인사에서 유배정객으로

이로 인해 김정희는 55세에 인성리에 유배되어 1848년까지 9년 여를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추사는 당시 승승장구하던 경주김씨의 집안에서 태어나 북학파의 대가인 박제가의 학문을 전수받았으며 24세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했다. 이후 병초참판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외교사절단으로 북경에 건너가 중국의 여러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해동 제일의 통유'로 이름을 날리기고 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과 규장각을 거쳤고 충청도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형조참판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속칭 잘나가던 인사였다.

그의 적거지는 처음엔 대정현 교리(校吏) 송계순의 집이었으나 나중에 지금 추사적거지가 마련되어 있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하지만 추사가 적거하던 강도순의 집도 4․3때 불타버려 빈터만 남은 것을 1984년 강도순의 증손이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초가는 추사기념관을 대문삼아 드나들도록 돼 있는데 기념관에는 복사품이기는 하지만 추사의 글씨와 그림 등이 전시돼 있다.

초가는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안채)와 사랑채인 밖거리(바깥채), 그리고 모퉁이에 세운 목거리(별채), 제주식 화장실인 통시와 대문간, 방앗간, 정낭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사는 그중 목거리에 기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추사는 유배기간동안 절제생활을 하는 한편 다른 유배객들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학문과 문물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강기석․강도순․강사공․김구오․김여추․김좌겸․박계첨․이시형․이한우․홍석우 등이 추사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동안 서도에 정진, 추사체를 완성했는데 어쩌면 그에게 있어 추사체의 완성은 고뇌서린 제주유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가정도 해볼 수 있는데 추사체는 그의 유배산물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비평가 박규수가 '유배 이전의 추사 글씨는 중국 고대 비문 글씨와 스승 옹방강의 서체를 모방한 것이었는데 바다를 건너간 후에는 남에게 구속받거나 본뜨는 일 없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 냈다'고 평한 것에 볼 수 있듯이 추사는 제주에서의 유배생활동안 자신의 삶과 예술을 돌아보며 비로소 독자적인 사상과 예술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음을 시시하고 있다.

사실 추사는 당대의 영재로서 세도정치의 정치적 혼란기만 아니였다면 마지막까지 그 기개가 쏟구칠 인물이었다.

# 제주에서의 9년여 유배생활...그리고

하지만 불운한 시대를 만나 말년에는 10여년에 이르는 유배생활을 하게된다.

그러나 추사의 그러한 유배생활은 그에게는 오히려 서도에 매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더욱 성숙하게 되는 토양으로 작용하게 된다.

추사는 54세가 되는 인생 후반기에 정치적인 문제로 제주로 귀양을 오게 되는데 전주, 남원, 해남을 거쳐 제주로 오다가 해남 대흥사에 들르게 된다.

여기에는 그와 동년배로 많은 교류를 나누던 초의선사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추사는 그의 오랜 지기인 초의선사에게 원교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인사가 이광사인데 어떻게 좀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현판을 걸어놓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추사는 귀양을 가고 있었지만 그 기개는 펄펄 살아 있었다.

                                             원교 이광사 현판▶

사실 추사는 24세때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34세때는 문과에 급제하여 주요요직을 거치는 등 화려한 30-40대를 보냈으며 부친을 따라 청나라를 드나들며 신학문을 접하고 중국의 여러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해동 제일'이라고 칭찬까지 받았고 귀양을 오기 직전에는 형조참판(법무부차관)까지 승차해 있었으니 어찌 아니그러했을까.

이에 초의선사가 못이기는척 원교의 글씨를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

#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하지만 추사는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87개월이나 어어가는 동안 부인상을 당하였고 회갑을 맞기도 했으나 귀양처에서 쓸쓸히 외롭게 보내야 했다.

생각에는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유배생활은 길어져만 갔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날이 멀어지면서 추사는 외로움, 억울함,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글씨를 쓰고 또 쓰며 서도에 묻혀 살았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글씨를 완성해 낼 수 있었다.  ▲추사 현판

그러는 동안 인격적으로도 그 옛날의 오만함을 씻어내고 보다 너그러운 시각으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한단계 더 성숙해지게 된다.

그래서 추사는 1848년 12월 63세의 노구로 햇수로 9년만에 유배지에서 풀려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다시 대흥사에 들려 초의선사를 만났을때 다시 이광사의 글씨를 걸아달라고 부탁한다.

“이보게 초의, 저 대웅보전 글씨를 떼어내고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어주게”라고 말했다.

추사의 인생은 이렇게 제주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