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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천리를 돌아왔던 유배의 땅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

by 여랑 2011. 7. 2.

조선의 역사에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같이 회자되는 선비도 드물다. 부패한 권력층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냥했다가 훈구파의 반격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음에 이른 사림파의 리더 조광조는 이상적인 자치 국가를 꿈꿨던 조선의 개혁 정치가였다.

기묘사화는 중종반정과 관련이 매우 깊다. 조선의 스물일곱 명의 임금 가운데 왕위에서 쫓겨나서 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복권이 안된 두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되면서 광기로 변한 연산군의 폭정은, 이를 참다못한 신하들에 의해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끝을 맺는다.

마침내 크고도 깊었던 연산군 폭정의 상처는 유교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대의명분으로 성리학을 중흥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때 신진사류의 대표적인물이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인 조광조였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에 있는 조광조 적거지

1515년(중종 10) 왕비 책립을 둘러싸고 대신들 간의 알력이 시작되던 해에 성균관 유생 200명의 추천을 받고 관직에 오른 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중종의 신임을 받게 되면서 이미 기묘사화의 싹은 트고 있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여 중국 고대 하(夏)·은(殷)·주(周) 시대 왕도정치를 이상적 모델로 삼고, 먼저 왕도정치를 펴기 위한 기초로써 우수한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였다.

현량과 설치는 개국 이래 그 간의 과거제도가 권력층의 독식으로 폐해가 많았던 것에 대한 개혁적인 조치였다. 또 조광조는 도교의 제사를 주관하던 기구인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여 미신 타파에 힘썼으며, 향촌 사회의 안정을 위해 향약을 널리 시행하여 훈구대신들의 수탈 기반인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를 없애는데 주력하였다.

이는 부패한 훈구대신들에 대한 단호한 도전이었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임과 동시에 사림파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을 신조로 삼고 있었던 조광조가 겨눈 것은 훈구대신들이 공훈(功勳)으로 누리는 여러 특혜 중 경제적인 특권이었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는 중종반정에 공이 없는 대신들 76명에 대해 '반정공신위훈삭제(反正功臣僞勳削除)'를 감행하여 그들의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였다. 이 숫자는 전체 117명의 공신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하는 숫자로 당연히 정치적인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중종의 신임 아래 조광조의 개혁 정치에 불안감을 느낀 훈구파 대신들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모략을 구상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남양군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를 시켜 나뭇잎에 꿀을 발라 개미가 갉아 먹도록 만든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역모의 증거로 그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이도록 했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히니 그 죄를 바로 잡아 달라"는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의 상소문을 보고 급기야 조광조 일파를 단죄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이것이 사림파를 쑥밭으로 만든 기묘사화이다.

이에 성균관 유생 1000명은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면서 처벌에 반대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일러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부른다.      

조광조는 제주와 관련이 밀접하다. 기묘사화의 주동자로 지목된 충암(충암 김정(金淨)은 제주에 유배된 뒤 사약을 받고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죽었고, 본관이 제주이고 서화가로 이름을 날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은 조광조를 구하려고 상소문 첫 머리에 이름을 올렸다가 파직되어 고향인 능주의 중조산(中條山) 밑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칩거했다.

이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는 당시 조광조의 유배지이기도 하여, 양팽손은 조광조를 매일 만나면서 경사(經史)를 논했다. 양팽손은 조광조보다 6살이나 어리지만 뜻을 함께한 벗으로서 조광조가 유배 후 1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손수 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로부터 149년이 지난 정미년(현종 8년, 1667)에, 세월이 흐르면 조광조의 유허지(遺墟址)를 잃어버릴까 염려한 능주목사 민여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 유허비문을 부탁하니 "물은 차마 이를 폐할 수 없고, 땅은 차마 이를 버리지 못한다"는 감회 속에서 우암은 조광조를 기리는 비문을 지었다.

# 기묘사화로 1520년 의금부도사에서 파직돼 제주유배

제주 고부이씨 입도시조 이세번(李世藩, 1482~ 1526)도 기묘사화에 연루된 한 사람이다. 이세번에 대한 기록은 극히 미미하고 저서 또한 전해오지 않아 정확한 그의 행적은 알기 어렵다.

다만  《학포집(學圃集)》<기묘당금록(己卯黨禁錄)>에 기묘사화에 연루된 131명 가운데 이세번에 대해서 '이세번 의금부도사에서 파직되었다(李世藩, 以都事罷斥)'이라는 간략한 기록만 보인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이세번의 묘

또 작자 미상의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별과시 천거인(別科時 薦擧人)> '경외관동천인(京外官同薦人)' 78명 가운데 이세번에 대한 기록은, '전 도사 이세번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前都事 李世藩 有學文操守)'라고 했다.

별과에 천거된 사람은 모두 120명이었으나 등용된 사람은 모두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지만 굳이 천거되었던 78명을 모두 기록한 것은 그들의 학식과 행실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또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의 《지퇴당집(知退堂集)》 <황토기사(黃兎記事下)>에, '별과에 천거된 사람은 모두 120인인데 등용된 사람은 28인이며, 남은 사람은 92인이다(別科被薦凡一百二十人, 登科二十八, 餘九十人)' 라고 하였고, 천거인 가운데  '도사 이세번은 학행이 있었고 지조를 지켰다(都事 李世藩 有學行操守)'라는 기록이 전해온다.

《은봉전서(隱奉全書)》<기묘유적(己卯遺蹟)>에도 기묘사화의 관련인물들에 대해 죄의 경중(輕重)을 따라 처벌하고 있다. '도사(都事) 이세번(李世藩)' 은 '보외(補外)', 즉 좌천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은 모두 159인에 이른다. 이들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부터 1521년(중종 16년)의 신사사화(辛巳士禍)까지 화를 당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 기묘명현의 명단에 '이세손(李世孫)'이라는 이름이 보이나 본관과 생몰년도가 기록되지 않아 '이세번'의 오자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세번의 호는 백산(白山) 본관은 고부이다. 김봉현(金奉鉉)의 《제주유인전(濟州流人傳)》에는, 이세번은 조광조와 더불어 김굉필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투철했다…1514년(중종 8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정6품), 의금부도사(종5품)가 되었다.

기묘사화 이듬해인 1520년(중종 15)에 제주도 대정현 둔개(屯浦, 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에 장을 맞고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 후 병상에 눕게 되어 1526년(중종 21)에 타계했다.  

1962년 월성(月城) 김종가(金鐘嘉)가 쓴 <도사공행장(都事公行狀)>에 의하면, 이세번은 어릴 때부터 매우 특이하여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모시면서 훈계를 들어도 기뻐하였고, 배움에 게을리 하지 않아 스스로 일과(日課)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17·18세에 도에 뜻을 두어 '하늘이 나를 미물(微物)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였고,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나게 한 것이 행복이다'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이세번은 조광조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사화가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 이약수(李若水) 등 수백인과 함께 문을 박차고 나아가 상소를 올리면서 조광조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사람들이 그런 이세번에게 신변의 위태로움을 알리자 "군자는 화(禍)도 같이하고 복(福)은 오래 전에 선택되었다"고 웃으면서 답했다고 한다.

이세번은 유배 와서도 효제충신(孝悌忠信) 4자를 거울삼아 고전 읽기를 즐겨하였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서책의 중요성을 비유하건데 "주린 사람에게는 옥수수와 같고, 추운 사람에게는 옷감과 같으며, 우울한 사람에게는 악기와 같으니 세상의 도덕과 의리가 책 속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독서를 유독 좋아했던 이세번의 문집이나 문헌이 전하지 않는 것은 모두 병란(兵亂)에 유실(遺失)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학행이 뛰어났던 그의 과거시험의 경력이나 관직(官職), 시문(詩文)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안타까움만 남게 되었다. 

이세번의 아버지는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낸 이정(李精)이다. 이세번의 부인은 월성(月城) 석씨(昔氏)로 석보함(昔輔咸)의 딸이다. 석씨는 예의와 법도를 갖춘 절조(節操)있는 여사(女士)였다.

석씨 소생으로 두 아들이 있었으니 충현(忠賢)과 충효(忠孝)이다. 큰 아들 충현은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고 있었다.

# 아버지 임종 지켜보러 왔던 아들 어머니와 제주정착

이세번이 유배지에서 병으로 위독하다고 하자 석씨는 두 아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왔다. 큰 아들은 유배지에서 타계한 아버지를 묻고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대정에 남아 주민들의 훈학에 힘썼다.

이세번의 묘는 제주시 고산리 자수원(紫水員, 신물) 병좌(丙坐)에 석물도 없이 나지막하고 소박하게 조성되었다. 부인 석씨는 서귀포시 중문 회수동에 있는 석굴왓(石洞田)에 묻혔다.

이세번이 학행이 높고 성품이 강개하여 의협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고부 이씨 후대에서도 검증되고 있다. 현대사에 대표적인 인물이 장두 이재수이다.

이재수는 조정에서 파견한 봉세관의 학정(虐政)과 외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의 교폐(敎弊)에 항거하기 위해 1901년 신축년에 결연(決然)히 일어난 민중봉기의 주역으로 이세번의 12세손이다.

제주 4·3민중항쟁과 관련이 깊은 이승진도 이세번의 후손으로 시대에 앞서 민중의 입장을 대변했던 인물이다.

◀송악산에 앞골에 있었던 이세번 9세손의 무인석

송악산 정상 분화구 서쪽 자락 속칭 '앞골'에 이세번의 9세손인 가선대부 경희궁위장 이공지묘(嘉善大夫慶 熙宮衛將李公之墓)가 있다.

이 무덤에는 대정의 풍토를 그대로 반영한 석상이 있었다. 1854년 묘 주인이 무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무인석을 대정현성의 돌하르방과 비슷하게 만들어 세운 것이다.

# 신축민란 장두 '이재수', 4.3유격대장 .'이승진' 등 저항정신은 후손에도 이어져

대정현의 산방산 조면암. 두 기의 돌하르방 형 무인석은 손을 위 아래로 하여 몸에 붙였다. 벙거지를 쓰고 2중의 양각으로 눈을 묘사한 돌하르방 형 무인석은 100년 전(18세기)에 만들어진 돌하르방의 양식적인 전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같은 무덤의 두 기의 동자석 또한 모자만 쓰지 않았을 뿐 자세는 무인석과 비슷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무덤의 석상들은 수년전 송악산 개발붐으로 이장을 해버려 간곳을 모른다. 문화를 순식간에 말살하는 것이 개발의 허풍(虛風)라는 것을 절로 실감한다.
<김유정/미술평론가>---제민일보 2011년 7월2일(토) '김유정의 미술로 보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