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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천리를 돌아왔던 유배의 땅

북쪽을 향한 마음은 그리움이었을까, 증오였을까?

by 여랑 2013. 7. 19.

며칠전 봄바람이라 하기엔 다소 차갑게 느껴지게 불던 바람도 잠잠해지고 따스한 햇살이 세상을 끌어안고 하품하는 4월 어느 일요일, 우리는 다시 답사의 길을 잡기위해 약속장소로 발길을 세웠다.

 

지난밤의 술자리로 느긋하게 늦잠이라도 청하고 싶은 마음을 살포시 누르고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모든 회원들이 먼저나와 그동안 만나지못해 품어두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언제나 만나면 푸근해지고 편안해지는 사람들이다.모두들 모여 담배한대 태울 정도의 시간을 반가운 만남이야기로 정리하고 차에 올랐다.

 

우리들은 참 이상하면서도 묘했다. 만나면 그렇게 허물없고 다정한 사람들이지만 헤어져서 다음에 만날때까지의 기간에는 서로가 연락을 거의 하지않고 지낸다. 그래도 이심전심일까, 만나면 마음의 교감이 서로의 가슴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동쪽지역의 일부를 답사하러 떠나고 있다. 연북정, 와산리 동원터, 공예단지, 토끼섬, 식산봉, 섭지코지를 보기로 오늘의 일정을 잡았다.

 

차는 삼양검문소를 지나 진드르를 힘차게 질주하더니 신촌을 지나 조천에 들어오더니 연북정이라는 표지가 있는 길목에서 좌회전 한다.

 

연북정(戀北亭)은 조천리 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름 그대로 북쪽을 그리워하는 정자란 뜻이다. 

지금의 판문점에 있는 망향의 동산처럼 이곳은 제주로 파견된 관리나 유배인들이 고향과 임금이 있는 북녘땅 한양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 조천관-쌍벽정-연북정으로 이어지는 정자의 역사

이 연북정은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게 평정된지 100년후인 고려 공민왕 23년(1374)에 세워졌는데 당시에는 조천관이라고 불리웠고 위치도 조천진성 밖에 있었다고 한다.

그후 조선 선조 23년(1590)에 제주 목사 이옥(李沃)이 성을 북동쪽으로 넓혀 쌓으면서 성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쌍벽정이라고 고쳐불렀으며 9년후인 선조 32년(1599)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건물을 중수하고 연북정(戀北亭)이라 이름을 고쳤다.

 

연북정은 그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했는데 지금 건물은 1973년에 수리한 것이다.

 

높이 14자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동남향으로 건축했으며 서쪽은 포구이다. 건물 북쪽에는 타원형의 성곽을 쌓았는데 이 성곽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이 정자는 망루의 용도로도 사용됐음을 시사한다.

재목을 결합하는 방식이나 기둥 배열 방식이 모두 제주도 주택의 형태와 같고 건물은 기와 합각지붕에 바닥은 마루이며 벽이 없이 내부는 모두 개방되었다.

 

죄인에게 가해지는 형벌중 하나인 유배는 중죄인에게 내려져 왔는데 고대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제주도가 유배지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원(元)에 의해서였다.

 

원나라때 와서 '목마(牧馬)의 섬 제주', '유배의 섬 제주'라는 단초가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삼별초를 진압한이후 도적과 죄인들을 유배보내을 뿐만 아니라 왕족과 관리, 승려까지도 유배를 보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원나라의 뒤를 이은 명나라도 원의 세력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운남을 정벌한후 왕자들을 비롯한 가족들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이처럼 고려들어 이용되기 시작한 제주 유배는 조선시대들어 본격적으로 많아 지는데 특히 조선중기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남용되게 된다.

 

원래 '대전회통'에는 '제주에는 죄명이 특히 무거운 자이거나 특별한 교지가 없는 한 정배되지 않는다'고 규정했으나 이는 중기이후 정권탈취를 위한 골육상잔의 당쟁이 많아지면서 옥사나 환국이 빈번하는데 상대방을 격리시키기 위한 장치로 유배제도가 적극 활용된 것이다.

# 당쟁이 격화되며 먼거리 무인도 등 절해고도 유배지 '인기'

 

이는 정치적 반대파를 완전히 고립시키자는 의도에서 비롯됐는데 따라서 변경이나 내륙지방으로의 유배는 아주 적어지고 유인도나 무인도 등 절해고도에의 유배가 상대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섬중에서도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도나 백령도는 왕족 등 특수한 경우에 국한되었으며 대부분은 전라․경상․평안도의 연안에 위치한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를 비롯한 흑산도․진도․완도 등 전라도 연해의 여러 섬이 유배의 대상지로 많이 이용되었다.

무엇보다도 유배지로서 제주도가 주로 이용된 것은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의 섬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말이 되면 도내에 유배된 정객이 수십명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두고 김윤식은 '제주목의 유배인인 갈수록 늘어 마치 섬 전체에 가득 찬 것 같아 이곳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웃고 한편으로는 한탄한다'고 그가 저술한 '속음청사'에 적고 있다. 

이들중에는 광해군과 같이 군주였다가 패주로 몰려 귀양온 인물도 있고 이외에 왕족으로는 인목왕후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의 외조모인 노씨(盧氏), 인조 6년 대북파의 모반 수괴로 지목됐던 인성군과 그의 가족,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인조의 손자인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 등이 있다.

 

거물 정치인이거나 유배중 이곳에 영향을 많이 끼친 유배인물로는 충암 김정, 추사 김정희, 우암 송시열, 동계 정온, 서재 임징하, 승려 보우, 면암 최익현, 독립운동가 이승훈, 운양 김윤식, 고종의 사위 박영효,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조 500여년동안 제주지역에 유배된 사람은 대략 200명 내외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들은 들어온 길목도 각각이다.

 

제주유배는 보통 강진․영암․해남을 출발해 소안도․진도를 거쳐 별도포(화북)로 들어오는 것이 정상이지만 기상악화로 인한 풍향이나 조류관계 때문에 도착지가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강영은 함덕포로 들어왔고 김만희는 애월포, 이세번은 신도포, 김춘택은 조천포, 조관빈이나 김정희는 별도포, 광해군은 어등포(행원)로 제주에 상륙했다.

 

제주에 유배된 이들은 이 연북정에서 다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서로를 위로하고 시를 읇거나 때로는 술도 마시며 향수를 달래고 임금을 향해 변함없는 충절을 다짐했다.

 

그들은 이 낯설은 절해고도에서 절망과 고독을 맛보며 고통을 당하면서도 충성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억울한 심정과 처지를 표현하면서 군왕이나 정치적 동료들로부터 다시 추천되기를 갈망하고 자기자신을 지탱시켜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바라본 연북정

이제는 제주로 유배와서 이 연북정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일은 없는 세상이 된 것을 어찌 생각해야 되는지 곰곰이 추스르다보니 차는 한라산을 향해 힘차게 오른다.

 

차는 와산을 통과하고 계속 오르막을 오르더니 동부산업도로(지금의 번영로)와 남조로가 교차되는 지점까지 왔다. 이곳에서 동부산업도로로 좌회전해 동쪽으로 수백 미터를 더 가니 남으로 산굼부리, 북으로 와산으로 가는 네거리가 나온다.

 

이 네거리에서 서쪽 100여m 지점 잡목 사이에 선정비가 네 개 남아 있는데 이것이 이곳이 원터임을 알려 주고 있다.

 

원은 고려 시대에도 있었으나 주로 조선 세조 때부터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을 위하여 역과 역 사이의 중요한 곳에 설치한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관으로서 처음에는 관원만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일반 나그네도 이용하였다.

 

각 원에 원주를 두고 원주전도 따로 나누어 주었으며 스님을 원주로 삼은 곳이 많았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전국에 1310개소에 원이 있었다고 하며 그중 제주에는 동원, 서원, 의귀원, 하원(서귀포시 하원동), 동제원(제주시 화북동 오현학원 동쪽) 등 여러 곳에 있었다.

 

제주성에서 대흘리의 동원(보문원 普門院)을 거쳐 정의현성(縣城)까지를 동로, 제주성에서 광제원(서원)을 거쳐 서광리 5거리 원오름 산자락의 이왕원(梨往院)을 지나 대정현성까지를 서로, 정의현성에서 영천관, 법화원, 중문원을 거쳐 대정현성에 이르는 길을 남로라 해 둔다.

 

이런 관원(館院)은 교통의 요충지이며 관은 조천, 영천 둘 뿐이고, 원은 여러 개 있었다. 간선도로의 원은 늘 주막이 빈번하며 그 원을 중심으로 각 마을, 각처로 거미줄처럼 작은 길이 뻗쳤다.

 

광제원에서 외도의 수정원으로, 엄장의 원(院)-드르로, 또 애월진성, 명월진성 등으로 이어지며 동광6거리의 이왕원에서는 북쪽으로 명월진, 차귀진. 남쪽으로 동해진, 서귀진으로, 또 상원(上院:존자암), 중원(中院:법정사). 하원(下院:법화원) 등으로 가게 된다.

   동원터 선정비

 

동원(보문원)은 동부산업도로 꾀꼬리오름 북쪽, 서원(광제원)은 서부산업도로 경마장 동쪽 지금의 원동마을터에 있었다. 동원이 있었던 이곳 네거리는 4․3 때 군경합동 토벌대 주둔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여러 곳의 원 중에서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은 유일하게 이곳 동원으로 사상 정기원(서기 1864년), 사상 백낙연(서기 1880년), 판관 송상순(서기 1880년), 판관 강인호(서기 1892년)의 선정비가 잡목 사이에 세워져 있다.

 

이들 중 정기원은 서기 1863년 제주방어사로 제주도에 도임하여 강제검의 난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제주를 떠난 뒤에도 서기 1871년 강화도에 진무사로 파견되어 활약하였고 총계사, 어기대장, 훈련대장 등을 지낸 유명한 장군이다.

 

백낙연은 서기 1877~1881년 사이에 제주목사로 재임했던 사람이다. 그가 제주목사로 도임하던 서기 1877년에는 메뚜기떼로 농사에 큰 피해가 있었고, 그 이듬해에도 흉년이 들어 많은 기아자가 발생하였다.

 

이 때 그는 호남 사창미를 계청하여 기민을 구제하였으며, 이밖에 제주성 동문과 남문 밖에 큰 길을 닦고, 사마재를 설치하여 선비들이 과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제주목사로 오기 전에는 서기 1866년 철산부사로 재직 당시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와 협의 끝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버린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백낙연 목사의 선정비는 제주목 관아지, 한경면 용당리, 한림읍 동명리 명월성지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