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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의 언어/문화/민속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제주장례'

by 여랑 2011. 4. 30.

어느지역이던 함께 살다간 사람이 임종하면 어떤 형태로든 장례를 치르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제주의 장례풍습은 섬의 문화만큼이나 독특하다. 임종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조관이다. 조관을 해야 조문객을 받을 수 있고 성복제를 시작으로 장례의 모든 의식이 진행되기 시작한다.

# 임종후 첫 일이 '조관'....사돈집서 팥죽 쑤어와 대접

제주에서는 조관할때 전통적으로 사돈집에서 팥죽을 쑤어 오는게 관행이었다. 상제들과 친지, 상가를 돌보는 사람들을 위해 쑤어 오는 팥죽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전설이 전해져온다.

<옛날 부친상을 당한 상제는 애통하고 경황이 없어서 사흘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했다. 이를 보며 몹시 안타까와하던 이웃집에서는 상제의 건강을 위해 닭죽을 쑤어다 주었다. 상제는 이로써 요기하여 기운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 상제는 보통식사는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믿어서 사돈집에서 팥죽을 쑤어 가는 관행이 생겼다>

<옛날 어느 대감집에 우둔하고 몰염치한 이가 살았었다. 얼마나 몰염치했던지 동네에 초상이 나기만 하면 상가에 가서는 차려놓은 음식을 모조리 먹어 치우곤 했다. 동네에서는 이 사람의 행패 때문에 큰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어느 집의 장사때에는 조관할 때 팥죽을 쑤었는데 이 몰염치한은 어디 팥죽이야 먹겠는가하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 몰염치한은 사람이 아니라 악귀였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이 악귀의 침입을 막기위해 조관할때는 으레 팥죽을 쑤게 된 것이 굳어진 관례로써 전해졌다. 이 악귀는 인간에게 감기도 주는 악혼임이 밝혀지자 동지날에는 집집마다 팥죽을 쑤어 먹음으로써 이 악혼의 침입을 막는 풍습도 생기게 되었다.>

# 첫 제례는 '성복제'....발인전날 신시에 '일포제' 봉행

성복제는 입관성복한후 초상에서 처음으로 치르는 제례이며 발인전날 신시에는 일포제가 치러지는데 이 제례의 제물은 맏딸인 여상제가 차리는 경우가 많았다.

장례때 친족들의 부조는 철저히 의무적인데 그 의무를 어겼을때는 크게 지탄받았다. 친족들이 하는 부조를 고적이라 불렀다. 옛날에는 떡과 쌀로 했지만 이제는 그냥 현금으로 모아서 주며 고적은 지금도 대부분 철저하게 시행되고 있는 집안이 많다.

또한 겹부조가 있어온 제주의 경우 남자들은 향상에 봉투를 넣는 것으로 부조가 되지만 여자들은 상가의 여상제들한테 일일이 개별적으로 부조를 했는데 여상제가 많으면 부담이 되기도 한다.

# 장례일 아침과 점심은 딸들이 담당

도내 산남지역에서는 장례일 조반과 점심은 딸들이 담당해 왔는데 같은 마을에 살 경우에는 상두꾼이나 친척들이 딸집으로 가서 식사를 했으며 음식접대에 따른 일체의 시중도 딸의 시댁식구들이 했다.

같은 마을에 살지 않는 경우에는 시가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마차에 싣고 장지에 가서 대접을 하거나 먼 곳에 살 때에는 장지 가까운 적당한 곳을 고른후 재료를 날라다 그곳에서 음식을 마련해 먹였다. 이처럼 출가한 딸이 음식을 접대하고 아들과 마찬가지로 장례시 부조의 접수와 분배 및 장례비용의 분배에 참여하는 것은 육지의 전통과는 판이한 것으로 독특한 제주문화의 하나이다.

이제는 여상제가 장례날 수레를 끌고 음식을 날라오는 풍습도 사라지고 어릴적 보았던 조관때 사돈집에서 팥죽을 쑤어 오는 일도 볼 수 없는 시절이 되어버렸지만 그 세월이라는 것이 채 1세대(30년)도 안된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제주속담에 살아서 한번 호사하고 죽어서 한번 호사한다는 속담이 있다. 땅이 메말라 가난에 허덕여 왔을 뿐만아니라 모진 역사에 시달리면서 찌든 삶을 살아야 했으므로 이 세상에 태어나 호사한다는 것이 혼례를 치를 때 만인의 축복을 온몸에 받으므로 호사하는 셈이요 죽어서는 초상을 치를 때 숱한 사람들이 애달파함으로써 호사하는 셈이란 뜻으로 그만큼 박한 생을 살았다는 것인데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지금으로서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 살아서 한번 호사하고 죽어서 한번 호사로 박한 삶 마감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삶을 살았던 시대에도 갖은 은혜를 입은 부모상을 당하면 매일 거르지 않고 부모가 살아계신 것처럼 모신 상위에 더운 밥을 올렸고 보름을 주기로 삭망을 했으며 삼년상으로 치렀다.

하지만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고 음식이 넘쳐나고 각종 생활의 편의를 주는 물질문명을 대하면서 살고 있지만 부모상을 당해도 매일 음식을 올리던 의식과 정성은 벌써 사라진지 오래고 1년상도 치르지 않고 후다닥 끝내버리는 것은 바쁘고 남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친다는 핑계로 너무나 우리들의 편의로만 흐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하긴 옛날에는 살아서 한번 호사할 정도밖에 안될 정도로 어렵게 살았으니 죽어서 한번 호사도 해드려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격식을 갖춰 거행했고 요즘은 살아서 호사가 많으니까 죽어서 호사는 하지 않아도 될 시대가 아니냐고 한다면 할말이 없지만 말이다.

# 무덤은 죽은자가 누워있는 자리가 아니라 이승과 저승의 만남 공간

장례가 마쳐지면 이제는 무덤으로 변화되는데 이는 단순히 죽은자가 누워있는 곳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이다. 어느 무덤이든 무덤은'죽음'이라는 낱말과 항상 병존하는 존재이지만 제주의 무덤은 국내 다른 지역은 물론 외국의 경우와 비교해 상당히 특이성을 갖고 있고 아름다운 미학공간으로 감탄사를 내뱉게 한다.

이는 죽은 자가 묻힌 봉분과 그 주위를 현무암 돌담으로 둘러싸는 '산담'의 직선과 곡선이 조화롭게 그려내는 조형미가 있어 가능하다는 것에 전반적으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

제주도 무덤을 특색있게 하는 것으로 산담의 역할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리고 제주의 무덤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오랜 세월동안 제주도민의 생활속에 녹아들어 마음속에서 마음속으로 면면히 이어져온 제주도민만의 고유하고 향토색 짙은 생활문화의 내면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느지역을 방문해도 '조상이 잘 돼야 자손이 번성한다'는 믿음이 신앙으로 자리해 있듯 제주지역도 조상 모시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는 전통매장풍습이 매우 뚜렷하다.(물론 요즘은 묘지나 벌초 문제 등으로 인해 세태가 많이 바뀌어 화장도 많이 한다)

지관이 명당을 찾아 묘자리를 한 번 정해주면 그것이 설령 남의 땅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고인을 모셔야한다. 이로 인해 밭안에 위치한 무덤은 그 밭주인과 어떠한 연고관계가 없는 경우를 지금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조상을 명당자리에 모시기 위한 욕심으로 서로 다투는 소위 '산터 분쟁'도 발생하지만 제주인들은 서로 원수지간이 아닌 이상 묘자리 사용에 대한 부탁을 거절치 않는게 상례였다.

아마도 내 조상이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조상 역시 그러하다는 인식이 배어있는 까닭으로 풀이된다.

# 산담에 난 신문...왼쪽이면 남자...오른쪽이면 여자

제주의 무덤을 특색있게 하면서 동시에 산불 또는 말과 소가 묘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방지키 위한 '산담'역시 조상숭배사상에서 출발한다.

특히 제주의 무덤은 그 안 망자의 출입문으로서 산담에 내어 놓은 '신문(神門)'으로 남녀를 구별하는데 망자의 머리를 중심으로 신문이 왼쪽에 위치하면 남자, 오른쪽은 여자의 묘이다.

이처럼 신문으로 무덤의 남녀를 구별한 것은 우주나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과 생성소멸을 설명하는 음양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조상숭배사상이 다른 어느 곳과 비교해 못지않았던 제주인들은 한반도 다른 지역과는 달리 주택 뒷편에 묘를 위치하는 것과 달리 살아있는 자의 생활공간과 망자의 무덤은 서로 떨어져야 한다는 풍수설을 지녔다.

이는 음력 8월 초하루부터 시작되는 벌초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이 시기에 후손들이 찾는 조상의 묘 대부분이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음을 감안하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문헌 자료 또한 이의 근거를 뒷받침하는데 제주도의 명당을 소개한 작자미상의 '영주영도초'에는 묘소와 주거지는 늘 떨어져 있어야 후손이 안전하고 무덤이 집과 인접하면 저승길이 가까워진다고 쓰여있다.

이처럼 주거공간과 묘를 구분하면서도 산 자의 생활공간인 민택(民宅)과 죽은 자의 집인 무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성을 나타낸다.

민택이 유선형의 초가지붕과 돌담, 정낭으로 구성되듯 무덤 역시 유선형의 봉분과 산담, 신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산 자의 삶의 공간을 자연스럽게 망자의 무덤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따라서 산담은 민택(民宅)으로 치면 집담인데 올레와 같은 아주 아름다운 곡선이 존재한다. 산담은 겹담으로 쌓았음에도 기와집 처마의 선(線)을 닮아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 활처럼 휘어있다. 이 쾌단(快單)한 선이야말로 제주사람들의 심성처럼 빠른 바람에 길들여진 삶의 곡조와도 같은 품격을 안겨준다.

또한 눈길을 끄는 것은 산담안에 있는 영혼과 대화하면서 항상 지켜주는 동자석이다. 돌이 많은 제주에는 돌하르방 등 석상문화가 발달돼 있다. 이 석상들은 크고 작은 기공이 많이 들어간 제주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조야하면서도 순박한 맛을 자아낸다.

이러한 석상중 제주의 서민무덤에는 무덤속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아이의 형태를 한 동자석이 종종 눈에 띈다.

# 제주무덤 동자석 '망자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보다 망자를 모신다는 의미'

동자석은 신앙적으로 살펴볼때 제주인들이 조상을 섬기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서 세워진 것이다. 그 모습은 무덤마다 제각각으로 영혼을 위해 술을 따르거나 예쁜 새를 가슴에 안은채 비념을 하고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아 예를 갖추기도 한다.

제주의 산담안에 서 있는 동자석은 사람이 만들었어도 오히려 자연과 융화가 잘 되는 모습이다.

이같은 동자석은 한반도 다른 지방이나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수 있지만 제주의 동자석은 남녀나 계급적 구분없이 서민적이다.

또한 장군석․문인석 등 타지역 석상이 주검의 영혼을 '지키기'위한 것과는 달리 제주의 동자석은 손에 꽃․술병․술잔 등을 쥐고 있는 것으로 봐서 주검을 '모시는' 위로적인 것이라는 점 역시 독특하다.

영혼을 모시는 신앙적인 측면도 있지만 동자석은 그 속에 나타난 선의 흐름․천진무구한 표정․등신(等身)의 비율 등에서 미술학적으로도 뛰어남을 느낄수 있다.

동자석은 신체중 많은 비율을 얼굴의 이목구비가 차지하고 있는데 눈이 가로선 一자이면 입도 一자 형식이며, 눈이 타원형이면 입도 타원형과 비슷하게 나타난다. 또한 음각이면 음각, 양각이면 양각으로 처리되는 일치성도 보인다.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 무덤, 하지만 제주인의 내세관은 망자를 죽은 자로 인식하기보다는 저승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 위한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했다.

그랬기에 제주인들은 무덤을 지키고 가꾸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음력 팔월 초하루를 전후한 시기에 제주의 들녘에서는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이 연출된다.

이른바 벌초 또는 소분으로 불리는 행사인데 절기로는 백로․추분이 있는 음력 팔월 초하루를 전후해 선묘가 있는 곳을 찾아 봉분의 풀들을 베어내고 무덤주위를 단장하는 것이다.

굳이 이때 벌초를 하는 것은 들에 자라는 풀들이 이때쯤이면 성장이 절정기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통 팔월 절기로 접어드는 '백로'가 되면 찬바람이 불어 풀의 성장을 다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베어낸 풀은 씨앗을 맺지 못하게 되는데 선조들은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수백년동안 살아오면서 체험적으로 체득한 생활의 지혜였다.

# 절기로 풀 성장이 최고조인 백로.추분에 벌초하는 체험적 지혜

벌초는 제주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조상숭배사상에서 출발한 묘지관리방식이다. 즉 조상 모시기를 으뜸으로 하는 이 지역의 풍속은 무덤․산담 등 전통매장풍습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가꾸는 벌초로 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명당자리에 묘를 쓰는 것이 조상을 잘 받드는 것이고 산담이 조상의 묻힌 무덤을 지키는 것이라면 벌초는 조상이 남에게 흉이 되지 않도록 잘 가꾸고 그 음덕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제주인들은 자신이 저승이라는 새로운 세계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에도 후손들에게 조상에 대한 벌초를 잊지 말도록 당부한다.

타지역이 청명․한식․추석에 성묘를 하는 것과 달리 제주의 벌초는 보통 음력 팔월 초하루에 시작해 보름이내에 끝마치는 것이 상례인데 팔월 초하루가 되면 모든 제주인들은 만사를 뒤로 하고 문중 전체가 참여하는 이른바 '모듬벌초'에 참여한다.

모듬벌초에 참여한 이들은 조상의 묘소에서 풀 한포기를 벨 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다시 되새기며 잊혀져가는 조상의 숨결을 마음속에 느끼고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 팔월 초하루에 시작했던 벌초풍속도 빠르게 진행되는 산업화에 따라서 이제는 상당히 변모하고 있다.

이제는 굳이 팔월 초하루를 완고하게 고집하지 않는 집안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보다는 오히려 어린 자녀들이나 직장인들이 참여할 수 있게 일요일을 선택하는 집안이 많다.

또한 언제부터인가 벌초대행업체가 생겨나고 모듬벌초에 참여하기 보다는 대신 돈을 보내는 현상이 점점 두두러지고 있다.

그렇지만 제주인들은 반드시 한가위 전에는 태풍이 몰아치든 폭우가 쏟아지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벌초를 끝내야 한다는 믿음에는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오랜세월 제주인의 생활내면을 면면히 간직하며 미학공간으로 자리한 무덤. 하지만 해안․중산간 가릴 것 없이 새로이 뻗는 도로와 골프장 등 각종 대형 관광․레저시설은 계속해서 수많은 무덤을 갈아 뒤엎고 있다.

매장문화가 강한 전통으로 인해 분묘가 늘어나면서 농토가 좁아지고 임야가 훼손되는 것은 물론 각종 개발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등 좁은 국토에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이성보다 감성을 앞세우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 교통불편하고 수작업으로 하던 벌초 이제는 기계로 15분이면 후딱하는 세태에 마음 한편 '씁쓸'

정착형태를 위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산업사회로 급속하게 전환되면서 벌초 문제로 갈등을 빚는 집안도 적잖이 늘어나고 있다. 기계로 굉음을 내며 15분이면 무덤 1곳을 휘리릭 마쳐버릴 수 있는 세월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옛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낯을 갈고 점심을 메고 걸어서 먼 곳이면 하루 1자리, 가까운 곳이라도 예닐곱 자리밖에 하지 못하던 시절이 오히려 어려웠지만 조상에 대한 고마움이나 넉넉한 마음은 지금보다 더 했다.

또한 예술적․신앙적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제주미의 원형성을 간직하고 있는 동자석도 방치되거나 도난 혹은 타지역으로 유출되는 등 수난을 당하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또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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