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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의 언어/문화/민속

올레와 정낭

by 여랑 2011. 10. 21.

우리나라 어느 시골이 그렇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옛 제주의 시골은 아늑하면서도 넉넉함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유선형의 초가지붕과 둥근 오름이 부드럽게 돌아감는 곡선형의 '올레'와 조화를 이루면서 제주의 선()이 빚어낸 아름다움이 주거공간속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의 자연미는 공간에 부드러운 리듬을 부여한 올레에서 시작되고 그 선이 주는 아름다움으로 '올레의 미학'을 제주미의 으뜸으로 여긴다.


제주도 주택에서 가장 특징있는 공간인 올레는 거릿길에서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긴 골목이다.

                              제주의 옛 전통올레

물론 타지역에도 '고샅'이라 불리는 대문앞까지 유도된 골목길이 있지만 그 형태나 기능에 있어 제주의 올레와는 전혀 다르다.


길이가 짧고 직진형태인 육지의 고샅이 주택의 주요 주거공간인 안채와 정면으로 마주보도록 된 것과는 달리 제주의 올래는 길고 휘어지면서 안거리의 정면을 빗겨나도록 돼 있다.


이는 민가(民家)가 그 지역의 인문
자연사회환경 등 공통된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주생활 문화체계로서 자리하는데 연유한다.


즉 유선형의 지붕과 그 물매가 흔히 발생하는 거센 비바람으로부터 주택을 보호키 위한 것이듯 올래 역시 집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세기를 완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처럼 올레는 그 길게 구부러진 곡선을 이용, 바람의 풍속을 감소시킴으로써 거센 자연환경으로부터 안정된 주택공간을 제공했다.

 

더욱이 선인들의 삶의 지혜는 올레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개의 제주민택에서 보이는 마당은 올래의 높이보다 낮게 그 지반이 형성돼 있다. 이는 올래에서 그 기세가 꺾인 바람을 한 번 더 그 풍속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풍속 감소기능 외에도 올래에는 외부의 시선을 차단, 독립된 내부공간을 확보하려는 제주인들의 의지가 투영돼 있다.


입구역할의 '어귀'에서 시작된 곧지 않은 올래는 마당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 끝부분인 올래목에서 다시 한번 구부러져 있다. 그래서 올래목에 들어선 사람들은 집안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없다.


이는 거릿길에서 집으로 출입하기 위한 올래는 바람이 거센 제주지방에서 풍속(風速)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차단, 주택의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사실 물이 귀한 제주지방은 멀리 있는 우물로부터 물을 길어 날라야 했기 때문에 긴 올레란 참으로 불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올래의 기능과 그 미학을 더 중요시 여겼던 제주인에게 있어 그만한 고통은 아주 보잘 것 없었던 것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육지의 고샅 부지가 공동소유였던 것과 달리 제주인은
올래를 자기 소유의 땅위에다가 설치했다. 올래를 중요시 여겼던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처럼 진정한 멋을 알았던 제주선인들은 아무리 큰 길 옆에 위치한 주택이라 하더라도 마당으로 바로 출입구를 만들지 않고 긴 올레를 설치, 집을 들어오고 나갔다.


이러한 제주의 길 방식에 대해 학계에서는 올래가 최근 서구에서 발표된 현대도시계획기법인 '막힌 골목수법(Cul-de-Sac)'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막힌 골목수법은 근대도시계획가들이 정립한 현재의 일률적인 격자(格子)형 도로방식과는 달리 큰 길에서 바로 마을을 배치하지 않고 조그만 도로를 쭉 빼서 거기에 마을을 배치하는 도시계획이론.


하지만 개발이 진행되면서 올레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땅값 상승과 함께 근대 물질만능적 개념에 기초한 격자형 도시계획 도입으로 올래를 설치할 수 있는 여유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다.


# 이동통신의 원조 '제주정낭'

우리 선조들은 긴 올레가 끝나는 바깥 끝인 출입구 양 옆에 세워둔 정주목(정주먹)에 두 세개의 막대기인 '정낭'을 걸쳐놓아 대문처럼 사용했다.


이 정낭은 우마출입을 막았을 뿐 아니라 '외출'의 정도를 표시하는 기능을 발휘해냈다.

                           제주도의 옛 초가와 정낭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정낭을 통해 조상들의 믿음과 상부상조의 정신을 배우며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강조하는지 모른다. 이처럼'정낭'은 제주민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들 정낭은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산간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집마당과 연결하는 긴 올레 끝에 세개의 구멍이 뚫린 나무나 돌로 된 정주목을 올레 양 끝에 세우고, 그 구멍에 긴 막대기(정낭)를 걸쳐 대문을 대신한 것이다.


높았던 울담이 정낭을 걸치는 올레로 갈수록 낮아져 '제주사회가 신뢰 사회'였음을 엿볼 수 있다.'불신풍조'가 만연하는 요즘의 세태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우리네 조상들의 신뢰와 인정을 엿볼 수 있는 정낭은 취락구조와 도로확장 등으로 사라져 대문으로 대치되며 그 속에 깃들어 있던 정신도 퇴색해지고 있다.

요즈음은 밭의 입구에 정낭을 걸치는 등 정낭의 기능이 바뀌고 있어 본래의 의미를 찾기가 힘들 정도.


정낭이 걸쳐있으면 집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면 마을을 지키고 있던 할아버지들이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가 집도 들여다보고, 돼지와 소에게 여물을 떠 주기도 했다.

정낭이 걸쳐있으면 일터에 나가지 않고 마을을 지키고 있던 이웃할아버지들의 보호의 대상도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마을 노인들의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주민들은 하나라는 공동체의식이 발달했다.

집집마다 정낭이 걸쳐있으면 문을 열어놓아도 누구하나 울안을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나무 하나로 온종일 집을 비우고도 아무 걱정없이 지낼 수 있었다.

정낭은 보통 '소리낭'이라 불리는 상수리나무와 굴무기(느티나무) 등 썩지않는 나무가 이용됐다.


정낭은 보통 세 개를 사용했다. 세 개가 다 걸쳐져 있으면 주인이 종일 집안을 비운다는 표시이고, 하나가 내려있으면 장시간, 두개가 내려있으면 잠깐 외출했다는 표시라는 것이다.


제주대 문건 교수는 정낭의 기능을 디지털 방식으로 표현해 흥미롭다. 문 교수는 제주에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낭이라는 3개의 나무막대기를 사용해 집안의 인적정보를 외부에 알려왔다는 것이다.


문 교수에 따르면 현대의 디지탈 2 8비트 정보표시 방식으로, 정낭이 하나만 걸쳐있으면 정보표시 '001'으로, 두 개의 정낭이 걸쳐있으면 '011', 세 개가 걸쳐있으면 '111', 모두 내려있으면 '000'으로 표시했다는 것이다.


정주목에 정낭을 걸치는 집안에는 그 정주목을 신앙시하기도 했다.


정주목은 제주무속신화에서는 '남선비의 큰아들의 넋'이라고도 하는데  '올래직이(門戶守護神)'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정주목이 설치된 가정에서는 제사를 지낸 다음 반드시 잡식으로 이 정주목에 대접을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


어쨌든 정낭은 닫혀있으면서 닫혀있지 않은 우리네 인심을 엿볼 수 있는 제주문화다.

정낭이 있는 옛날 제주민들의 열린 주거 구조는 요즈음 꼭꼭 잠긴 대문과 높은 담장, 유리와 철조망으로 둘러쳐 내부를 차단하는 집구조와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그 의미도 사뭇 다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을 무시할 순 없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공동체로 살아갔던 시절이 그리운 것은 이제 지천명에 이를만큼 먹어버린 나이때문만은 아닌듯하다.